조선 건국 세력이 고려 불교를 비판한 이유

2024. 6. 6. 09:0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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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에 도병마사, 경기도관찰사,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인 남재는 태조 이성계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한다면, 신라가 불교에 미혹하여 그 재력을 다 없애서 탑묘가 민간에 절반이나 되더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의종은 3만 명의 중들을 공양한 것이 한 달에 10여 곳의 절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임천에서 탄식함이 있었으며, 공민왕은 해마다 문수법회를 개최하고 보우와 나옹을 국사로 삼았지만, 고려의 멸망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남재는 불교를 믿으면 나라가 곧 망하게 된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도 불교에 대한 내용을 「훈요 십조」에 담았습니다. 
  ‘내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 · 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훈요십조」 1조
  ‘신설한 사원은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 · 공후(公侯) · 후비(后妃) · 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훈요십조」 2조
  태조 왕건은 고려가 불교의 도움으로 개창되었다고 1조에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신봉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2조에서는 사찰의 무분별한 양적 확대를 경계한 조항으로 특히 제 2조는 지적한 폐단에 대해 대응책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찰이 늘어나면 그것은 승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의 증가는 나라 입장에서는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산에 종사하면서 국방을 담당하는 이들이 줄어드는 것이 국가적인 입장에서는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건의 「훈요십조」를 통한 우려는 후대 왕들과 지배층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고려에서는 불교가 단순히 종교로서 자리하지 않고 국가를 수호하는 호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왕실부터 일반 백성까지 많은 부문에서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여파로 사찰은 사원전(사찰 소유의 땅)외에 왕실 귀족들이 시주한 토지와 노비가 증가되어 대장원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려 시대 사찰이 막대한 토지와 부를 가지고 있을 수 있던 것은 신앙심에 따라 자발적인 기부가 한몫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절에 토지나 노비를 바쳤고 이것은 사찰의 막대한 경제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화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시주로 인핸 재정은 극히 미비했고, 왕실이나 귀족들이 토지를 기탁해 이루어진 사원전에서 막대한 수입을 거뒀습니다. 
  충숙왕 15년 (1328년) 통도사를 보면 땅의 사방 둘레가 1만 7000보가 되었다고 하며 이를 표시하기 위해 땅 둘레에 장생표 12개를 세웠으며 이 토지를 경자가는 사람들은 부근의 농민이나 사찰에 예속된 농부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원 간섭기에 이르러서는 그 폐단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 불교가 유입되면서 상황은 더 안좋아졌습니다. 불교행사, 사탑의 건립 등의 재정낭비가 극심했으며 승려들은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 상업행위, 양조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입니다. 거기에 세속화된 승려들은 비행을 끊임없이 일으켜 불교계가 전체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패된 불교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화되자 이를 비판하는 세력이 나타나는데 바로 주자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대부입니다. 
  ‘승려들이 화려한 사찰과 큰 집에서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즐기기를 왕자와 같이 하고, 넓은 토지와 많은 노비를 두어 문서가 구름처럼 많아 공문서를 능가하니, 불도에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을 떠나 청정하고 욕심 없이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조선 개국을 도운 정도전의 지적이었습니다. 
  ‘……신들이 가만히 듣건대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야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부자(父子)가 있고, 부자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위아래가 있고, 위아래가 있은 후에 예의가 비로소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요, 고금의 떳떳한 법이므로 잠시라도 거기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저 부처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대를 이어야 할 적자로서 그 아비를 떠나 부자의 친분을 끊고, 필부(匹夫)로서 천자에 항명하여 군신의 의(義)를 멸하며, 남녀가 집에 사는 것을 도가 아니라 하고, 남자가 밭 갈고 여자가 베를 짬을 불의(不義)라 하여, 자식을 낳고 사는 도를 끊고 의식의 근원을 막아 버리면서 (부처의) 도를 가지고 천하를 바꾸는 일을 생각하려 합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한다면 100년 후에는 인류가 끊어질 것입니다.’ 『고려사』권120, 「열전」33 [제신] 김자수

조선을 세운 이성계

 1391년(공양왕 3년) 5월 당시 성균생원으로 있던 박초(朴礎, 1367~1454) 등이 올린 척불 상소로, 불교를 말살하고 요순(堯舜)의 정치를 모범으로 하면서 왕조 중흥의 정치를 펼 것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성균생원으로 있던 윤향(尹向)⋅한고(韓皐)⋅허지(許遲)⋅김권(金綣)⋅이자찬(李子撰) 등 15명이 함께 상서한 것이기도 하여, 이들이 유불의 공존이 아닌 불교=이단, 유교=천하의 도로 분명하게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건국 세력이 불교를 비판한 것은 사원세력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도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우왕 14년(1388) 6월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고자 했을 때 이들의 가장 큰 숙제는 국방력 강화와 국가 재정 확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화하는 작업으로 창왕은 명을 내립니다. 그것은 태조 왕건 이래로 독식한 불자들이었던 고려의 왕들이 시주한 노비와 요물고의 토지들을 환수하라는 것입니다. ‘요물고’란 왕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창고였습니다. 환수된 토지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도 당시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나 그의 측근인 정도전, 조준의 생각이었는지 모릅니다. 고려 말에는 총 1만3000개의 사찰이 있었고, 그 사찰에 20만여 결(結)의 토지와 10만여 노비 그리고 15만여 스님이 속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고려 말 인구는 총 400만 정도, 경작 토지는 총 60만 결 정도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으니 이 중 젊은 스님을 군인으로, 토지를 몰수해 군량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력은 불교를 대체하는 이념으로 성리학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개창하기에 이릅니다. 이전에 무신집권자들이 왕이 되거나 새로운 왕조를 열지 못했던 것은 바로 고려란 틀을 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구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체계를 원했습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이 분열된 나라를 통합한 것이 아니었고, 기존의 틀 내에서 역성혁명을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기존의 고려와는 다른 것을 표방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불교를 타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고려문화의 뿌리인 불교를 비판하여 조선 왕조의 건국 정당성을 설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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