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세종대왕

2024. 2. 23. 10:0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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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은 음악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중시하였으며 예(禮)와 악(樂)은 왕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종묘제례에서 선왕의 공덕을 찬미하고, 제례악을 연주하면 조상이 감격하고,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사이가 존경을 하게 되어 이를 방방곡곡에 널리 퍼뜨리면 백성 교화가 실현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음악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향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바르게 고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용한 신하가 바로 박연이었습니다. 세종은 측근 신하들이 박연에 대해 비난을 많이 하였으나 이런 의견을 물리치고 수십 년간 곁에 두고 음악 사업을 주도하게 했습니다.
  1425(세종7)년에는 경기도 남양에서 ‘소리 나는 돌’ 즉 경석(磬石)을 발견하고, 채취하여 편경 제작에 돌입하여 세종 9년에는 편경 12장을 만들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많은 악기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세종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들여온 편경으로 연주했는데 경기도 화성시 건달산 일대에서 경성이 발견되면서 편경을 자체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편경은 모든 악기의 기준, 즉 조율 악기로 연주 방식이나 기후 조건에 따라서 음이 변화하는 가야금이나 대금 같은 악기와 달리 편경은 돌로 되어 있어서 음고가 일정하기 때문에 조율악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유교 음악에서 팔음은 무척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여덟 가지 악기 재료가 흙, 나무, 돌, 쇠, 실, 대나무, 바가지, 가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혼란기에 많은 악기가 소실되고 세종 대에 다시 음악의 정립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박연이 음악을 정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38편이나 올린 데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황종율관도 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세종 7년(1425)에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황종율관을 만들게 했습니다. 박연은 세종의 명대로 황종율관을 만들었는데 기장 알 90개를 늘어놓은 길이의 대나무에서 나온 소리가 황종율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보내온 편경의 황종음보다 약간 높았습니다.
  ‘우리나라가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춥고 더운 기후와 풍토가 중국과 현격하게 다른데 어찌 우리나라의 대나무로 황종관을 만들려고 하는가. 우리나라는 소리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옛 제도를 조사하여 황종관을 만드는 것을 옳지 않다.’


  우리나라 기장과 중국 기장의 크기가 차이가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몇 차례 시도 끝에 완성되었습니다. 황종율관은 모든 율관제작의 모체가 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도량형의 기준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아도 왕조가 바뀌거나 기타 중요한 계기가 있을 때면 정확한 황종율관의 제작에 관심을 쏟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황종율관이 도량형의 준거가 된다는 말은 곧 황종율관의 길이와 부피와 무게가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세종 때 기틀이 완성된 조선의 도량형이 사람의 신체가 아닌 음악에서 시작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제작된 황종률관의 길이는 황해도 해주에서 생산되는 기장(곡식) 중 크기가 중간치인 것을 골라 100알을 나란히 쌓은 길이를 황종척 1척(약 34.72cm로 추정)으로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종율관은 부피의 기준도 되었습니다. 직경 12밀리미터의 황종율관에는 기장알 1200개가 들어갑니다. 이 황종율관 두 개의 양을 한 홉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열 홉은 한 되, 열 되는 한 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음악 정비 사업에 대신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황종음을 찾고 율관을 만드는 것은 천자가 해야 할 일이지 제후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러한 반대에도 음악정비사업에 몰두하였습니다. 
  유학자 중에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로 공자가 있었습니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을 통하여 인(仁)을 배우고 인을 실천하여 예악(禮樂)을 행하라고 설파했습니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은 예악이 무너진 탓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순 시대의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악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세종도 공자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세종의 음악 정비 사업에 있어서 그 파트너를 박연으로 정했을 것입니다. 
  세종은 박연에게 아악을 정비한 것을 명합니다. 아악은 원래 중국 황실의 음악이었으나 당송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도 그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박연이 여러 문헌들을 오해서 아악을 복원하였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문묘제레악입니다.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은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顔子)·자사(子思)와 같은 중국의 성현과 설총·최치원과 같은 한국의 성현에게 제사하는 문묘제향에 쓰이는 음악으로 조선 세종 때 완성된 아악은 원전에 버금가는, 가장 이상에 가까운 아악의 형태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종은 음악을 통해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종: 너는 내가 아니었다면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네가 아니였다면 역시 음악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종실록』

세종 때 남양에서 양질의 경석이 발견되어 우리나라에서도 편경을 만들게 되었었다.


  이 때 세종은 더 나아가 중국의 아악이 아닌 우리의 향악을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멀리 동쪽에 있어 음악이 중국과 같지 않다는 것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우리 음악을 듣다가 죽은 뒤에는 아악을 듣게 되는 셈인데 제사 지낼 때 우리 조상님들이 평소 들으시던 음악을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연은 아악만을 쓰고 향악은 쓰지 말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세종의 뜻을 지지한 것은 맹사성이었습니다. 맹사성은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해서 쓰는 것이 낫다고 했으니 세종은 아악은 박연, 향악은 맹사성과 논하라고 하였습니다. 맹사성 역시 스스로 악기를 만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손님들이 맹사성의 집에 찾아와서 피리 소리가 나면 맹사성이 집에 있는 것이고, 소리가 안나면 한양 갔다고 생각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한 인물이었고 악공도 직접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종 때 음악 담당 기관인 관습도감의 총 책임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향악에 관해서 세종의 지지자는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들은 중국 음악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 하여 세종의 뜻에 반대하자 세종은 자신이 직접 우리 음악을 작곡하겠다고 합니다. 
  세종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음악에 담았고 이를 우리 가락으로 많은 사람들과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용비어천가」입니다. 세종은 신하들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 가사에 직접 가락을 붙였으니 훈민정음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입니다. ‘왕이 되어 날아올라(龍飛) 하늘의 명에 따른다(御天)’는 ‘용비어천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대왕은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을 따른 것임을 분명하게 하면서 조선 건국이 정당하다는 내용은 노래 가사에 가득 담아두었습니다. 백성들은 한글가사로 용비어천가 음악을 들으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학자들은 신성한 내용을 담아 백성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훈민정음의 반포를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종은 더 나아가 우리 가락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악보 정간보를 만들었습니다. 바둑판처럼 판을 나누고, 한 칸을 한 박으로 삼아 칸의 개수만큼 음 길이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세종이 남긴 「여민락」은 음의 길이까지 적은 정확한 악보가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복원과 연주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세조 6년(1460), 세조는 신악을 익히고, 대신 모든 옛 음악을 폐지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세조가 익히라고 한 것은 「정대업」과 「보태평」으로 세종이 만든 음악이었습니다. 「정대업」은 조종의 무공을 찬양한 15곡이고 「보태평」은 조종의 문덕은 찬양한 11곡입니다. 그리고 세조 10년(1464)에는 「정대업」과 「보태평」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으며 현재에는 우리의 무형문화재 1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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