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외교관 이예

2023. 10. 27. 07:3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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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 이예는 학성 이씨의 시조이자 조선 전기의 외교관이고 일본을 가장 많이 왕래한 통신사입니다. 통신사 사행에는 많은 수행원이 따르는데, 보통 통신사라 하면 정사·부사·서장관의 삼사(三使)를 말합니다. 조선을 통틀어 통신사는 모두 24회 파견되었는데, 그 삼사 중 이름이 알려진 이는 61명입니다. 이예가 4회, 윤인보가 3회 파견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각 1회 파견되었습니다. 이예는 일본 국왕을 알현한 4회 이외에도 이런저런 일로 유구국, 쓰시마, 규슈 등 일본 각지에 파견되었습니다. 
이예가 8세 되던 해(1380년·고려 우왕 6년)에 어머니가 왜구들에 의해 일본으로 잡혀갔습니다. 28세가 된 1400년, 그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쓰시마와 이키시마(壹岐島)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습니다.‘왜구가 울주 군수 이은과 수행원 박청, 서기 이예를 잡아서 돌아갔다.’ 『조선왕조실록』
 그가 학성 이씨가 된 데에는 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396년 울산에 일본 해적들이 쳐들어와 군수를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때 울산관아의 중인(中人)계급 아전이었던 이예(李藝)선생(1373~1445)이 해적선에 숨어들어 “군수를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해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군수를 모셨는데 이에 감동한 왜구들은 그들을 살려주었고, 이듬해(1397년) 외교 교섭에 의해 군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정은 이예의 충성심을 높이 사 벼슬을 내리고 사대부 양반으로 신분을 높여줬습니다. 이예는 이러한 활약으로 아전의 신분에서 나중에 종 2품까지 오르게 됩니다. 

조선은 1404년(태종 4)에 일본과 통교를 맺었습니다. 통일신라 때 국교 단절 이래 550여년 만이었는데, 조선은 왜구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했습니다. 고려 말의 왜구 폐해가 컸기에 왜구의 금압이 큰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 속에 생겨난 삼포는 두 나라의 공식적 교역 장소였습니다. 삼포 중 하나였던 염포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울산에 있었기에 지정되었을 것입니다. 
태종 16년인 1416년에는 조선 조정에서 큰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왜구에게 붙잡혀간 조선인들이 유구국(오키나와)까지 끌려가 노예시장에 매물로 팔리거나 감금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때에 나선 것이 바로 이예입니다. 그는 유구국에 파견된 처음이자 마지막 조선인 사절로 유구국까지 가서 조선인 포로 44인을 구출해 낸 것입니다. 포로 중에는 14세에 잡혀갔다가 20여 년 만에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1419년에 5월에는 전선 50척에 나누어 탄 왜구의 주력부대가 충청도 비인현, 즉 오늘날의 충남 서천군에 침입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잠자던 민간인 300여 명이 살해되었고 이에 세종 1년 6월 19일 이종무가 지휘하는 1만 7000여 병력이 대마도로 진격합니다. 이종무는 적선 129척을 격파하고 사로잡은 포로가 21명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대마도주의 항복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의 활약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예가 쓴 『학파실기』입니다. 당시 이예는 중군병마부수로 활약했습니다. 이예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의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해로에 익숙하고 대마도 내의 정세, 지리, 풍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약이 가능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예는 1401년 정식 외교사절로 처음 일본에 파견된 후 40여년간 40여 차례나 일본을 오가며 협상을 통해 667명의 조선 포로를 구출했습니다. 8세때 어머니를 왜구에 납치당한 아픔이 있던 그이기에 이 일에 더 자청하고 나섰는지 모릅니다. 71세 때 마지막으로 수행한 임무도 대마도 포로교환 협상이었습니다. 세종이 건강을 걱정했으나 자청해 건너가 포로 7명을 데려왔습니다.

1438년 어느날 세종이 중신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대마도 왜인(倭人)들이 교역을 빌미삼아 너무 많이 몰려들고 있다”며 이들의 체류 제한 방안을 물었습니다. 중신들이 “일본에 사신으로 간 이예가 돌아오면 숙의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자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이예의 잦은 일본방문을 안쓰럽게 생각한  세종이 1426년 그를 일본에 보내며 “일본을 모르는 사람을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게 생각하지 말라”며 갓과 신발을 하사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사행은 1443년(세종 25)년이었습니다. 왜구가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갔으므로 그가 자청하여 대마도체찰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신사년 겨울에 포로 된 50인을 찾아서… 경인년까지 10년 동안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포로 500여 명을 데려왔다. 병신년에 유구국에 사신으로 가서 또 40여 명을 데려왔고, 임인년 및 갑진년에 찾아온 사람이 70여 명이어서… 계해년에는 포로 7명과 도적질한 왜구 14명을 찾아왔으므로…’ 『조선왕조실록』
 그는 외교관으로서 왜구들에게 잡혀간 667명의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어떻게 포로들을 소환시킬 수 있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 『조성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첨지중추원사 이예가 아뢰기를, ‘… 국가대의(國家大義)로 타이르며… 그 생업을 유지하게 하오면… 왜인들이 마음속으로 기쁘게 성복(誠服)할 것입니다’ 하니, 예조에 내리었다.’ 『조선왕조실록』
이예는 오늘날의 비자 격인 ‘문인(文引)’제도를 확립하기도 했습니다. 태종의 왜구 정벌 이후 왜구의 침략은 줄었지만 일본인 왕래가 늘어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대마도주에게 ‘문인’ 발급권을 인정함으로써 수를 제한한 것인데요. 
‘대마도주 종정성의 문인이 없으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마라.’ 『조선왕조실록』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문인발행권을 줘서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들어오는 왜인들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려 했던 것이고 대마도주는 문인발행수수료를 받음으로써 도내에서의 정치적, 경제적인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강력한 왜인통제책으로 활용됐고 이를 규정하는 계해약조(1443)는 체결되기도 했습니다. 계해약조는 1443년(세종 25년), 조선이 교린정책의 일환으로 대마도와 체결한 협정으로 조선으로서는 일본 통교자의 도항 횟수나 세견선의 숫자, 교역량 등을 직접 명문화해서 통제하고자 했고 그 교섭을 한 것이 이예입니다. 이예는 그들에게 어업권을 주고 대마도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마도인에게 생존권을 준 것입니다. 
계해약조로 인해 비로소 한일 간에 안정된 시기가 왔습니다. 긴 역사 속에서 두 나라 관계가 제일 안정됐던 시대가 15세기에서 16세기인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예는 통신사 활동을 통해 대장경 및 불경을 일본에 전파하고 일본에서 재배되던 사탕수수와 일본식 자전물레방아를 국내에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예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과 멀리 유구까지 다녀왔고 그러면서 조선의 군선을 향상시킬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존 군선의 건조방식은 물론 군선의 활용과 전법까지 구체적으로 연구해서 조정에 건의하였습니다. 그는 선박을 급히 건조하지 말고 나무못 대신 쇠못을 쓸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또 검선에 한 자(약 30cm)되는 창과 칼을 뱃전에 벌려 꽂아서 왜선에 대비하고 비거도선은 전함 위에 실어서 움직여야 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왜구는 배에 기어 올라와서 칼싸움을 하는 전술을 썼으므로 방패선에다가 한 자 정도 되는 칼을 여러 군데 꽂아서 방패선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한 것인데 이게 검선입니다. 그리고 왜적들의 배를 추격할 때에 검선과 그 뒤에 비거도선을 한 줄로 묶어서 가게 하는 것보다 검선 위에 싣고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하였고 이를 건의하였습니다. 
‘동지중추원사 이예(73세)가 졸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이예는 1910년 순종 대에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100년 뒤에는 외교통상부로부터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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