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백리 누가 있을까
2023. 6. 13. 19:1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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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부정부패없는 세상을 꿈꾸는데요. 하지만 그런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맑고 흰(淸白) 것 같은 벼슬아치를 지낸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전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청백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청백리는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理想的)인 관료상으로, 의정부(議政府)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으로 쓰였습니다. 이러한 호칭을 받은 사람은 총 217명에 이르며 대표적 인물로는 맹사성·황희·최만리· 이현보·이언적·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있습니다.
맹사성은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여러 벼슬을 지낸 인물입니다. 나중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는데, <태종실록>을 엮는 일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만들었습니다. 맹사성은 욕심이 없고 청렴해서 청백리로 기록되었는데, 정승의 자리에 수십 년동안 있었지만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만큼 낡았고, 정승이란 높은 신분에도 소를 타고 다녔습니다. 맹사성의 좌의정 때 맹사성이 고향인 온양에 집안 어른들을 뵈러 올 때였습니다. 인근 고을 두 원님이 맹사성을 맞이하기 위해서 길을 깨끗이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길을 웬 초라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원님들은 못마땅해서 역졸을 시켜서 노인의 앞을 막으니 그러자 맹사성은 “온양 가는 맹고불(맹사성의 호)이가 소를 타고 간다고 알려라” 이렇게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 정승은 세종 때에 영의정에서 18년을 보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이 문병을 왔는데 황희 정승이 멍석 위에 누워있었습니다. 황희는 “늙은 사람이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면 그만입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 정승직을 맡은 유성룡 역시 청백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유성룡을 시기하는 신하들이 유성룡이 갖고 있는 농토가 후한(後漢)의 권력자인 동탁(董卓)의 것보다 더 크다고 왕에게 말했는데 실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자손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할 정도로 가난했으며 그는 청렴하고 강직했다고 합니다.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조선 3대 청백리로 꼽히는 이원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에는 이조판서, 1595년에는 우의정에, 1598년에는 영의정이 오르며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고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세자를 보내 조문을 하게 하고, 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승지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집을 가서 보니 집은 두어 칸 짜리 띠집이었고, 그나마 비바람도 가릴 수 없는 낡은 집이었습니다” 하니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인조가 “40여 년 동안 재상을 지내면서 초가삼간도 장만하지 못했더냐”라며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이항복은 예조정랑, 병조판서, 영의정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예조정랑이었던 1589년에는 정여립의 난을 잘 수습해서 공신이 되었고, 도승지를 지냈던 임진왜란 때는 선조와 함께 피난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가 영의정에 있을 때에 행차하니 그의 하인들이 “물러서거라”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광주리를 이고 가다가 미처 길을 피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자 하인들이 냉큼 물러나라며 방망이를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항복은 하인들에게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도록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엄하게 꾸중하니 백성들 중 누구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게 다 관직에 있는 자신의 잘못이라며 하인들을 타일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진 황희는 청백리라는 이미지에 맞지 않게 여러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세종 12년(1430) 11월 기록에는 제주감목관 태석균이 감목을 잘못하여 국마 1,000여 필이 죽었습니다. 처벌을 받게 된 태석균은 좌의정 황희에게 구명운동을 펼친 끝에, 황희가 죄를 처결하기도 전에 태석균의 고신(告身)에 서명토록 압력을 넣고 형량도 솜방망이 수준인 장 1백 대로 마무리지었는데 이에 사헌부가 들고 일어나 황희의 파면을 주장하자 세종은 황희가 법을 굽히려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속히 처결하려 했던 것이라며 두둔했습니다. 이 밖에도 황희는 수차례 뇌물사건에 연루되었고, 사위 서달의 살인사건을 무마하거나 아들 황보신이 절도 행각을 저지르는 등 황희가 청백리라는 것과 상반되는 일화가 여러 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본래 시골 출신으로 외람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판서(判書)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니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비(碑)를 세우는 일은 하지 말라’
이는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인데요. 명종은 박수량의 부음 소식을 듣고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이다’라며 비석을 하사했습니다. 그리고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해 백비(白碑)라고 부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전해오는 청백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고려가 멸망한 요인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원인으로 본 조선의 왕들은 건국초기부터 비리를 없애려 노력하였습니다. 업무와 관련 없이 순수한 떡값으로 재물을 주고받았더라도 처벌받았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빌려썼을 경우에도 처벌대상이 되었습니다. 관리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이나 이득을 취하는 모든 행위를 ‘장오죄’ 또는 ‘장죄’라고 하였고 부정을 저지른 관리는 장리라고 하였습니다. 뇌물액수가 일정금액을 넘어갈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 했으며 목숨을 보전하더라도 ‘도관물(盜官物)’이라는 문신을 새겨 평생 관직에 복직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본인은 물론 자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들과 손자는 과거시험조차 응시할 수 없었고 ‘장리안’이라는 명단을 따로 작성하여 그들을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근절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의 보수가 낮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전기에는 관리들에게 토지와 녹봉을 지급하였으나 1556년에 녹봉으로 일원화되었으며 이마저도 점차 액수가 줄어들었습니다. 17세기 허울만 남은 녹봉은 나중에 지급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퇴직하고 나면 앞날이 막막했으니 녹봉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족한 보수를 메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청렴한 관리에 대해 포상하기도 했습니다. 『고려사』「양리열전」에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양리를 설명하며 유석, 왕해, 김지석, 최석, 정운경을 거론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청백리에 대한 선발은 활발해졌으나 명확한 기준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1514년 명종은 청백리의 자손을 천거하여 등용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의 기초가 된 것은 『청백리자손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백리를 선정하면서 생존한 사람은 ‘청렴하고 매사에 신중한 관리’라는 염근리, 사망한 사람은 ‘재물에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라는 청백리로 구분하였습니다. 선조 이전까지는 왕명에 의해 선발되었고 선조 대에는 2품 이상의 관리들의 논의를 거친 후 청백리를 선발하였습니다. 이들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지만 청백, 근검, 경효, 후덕, 인의 등의 품행이 제시되었고 녹봉 이외에 일체의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깨끗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 관리들을 주로 선발하도록 하였습니다. 염금리와 청백리로 선발된 관리의 경우, 품계를 한 등급 내지 여러 등급을 올려주거나 중국산 옷감 당표리를 하사하였습니다. 청백리의 자손에게는 주로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적장손에게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청백리의 후손으로 가난으로 끼니조차 못하는 이들에게는 진휼청을 통한 구휼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자격이 안되는 자가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1601년 염근리로 선발된 것은 김순이었으나 이 자는 사후에 권력자에게 받칠 담비를 잡기 위해 백성을 동원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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