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귀한 과일 감귤

2023. 6. 8. 19:0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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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여럿이 주황빛의 귤을 종류별로 나눠 상자에 포장하고, 그 옆에 앉은 남자들은 나무통과 짚단을 만들고 있다.

요즘은 흔한 것이지만 예전에는 귀하게 대접받는 품목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감귤입니다. 귤은 요즘 흔하디흔한 과일이지만 조선시대에 귤은 아주 귀했고, 따라서 왕실 제사에 오르는 과일이었습니다. 1448년 봄 창덕궁 희우정에 임금 세종과 집현전 문인들이 모였는데요. 신하들에게 하사한 과일이 없어지자 왕세자 이향이 남긴 시입니다.
‘향나무는 코에만 향긋하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맛있네. 동정귤은 가장 사랑하나니 코에도 향긋하고 입에도 달기 때문이지’
 이렇듯 조선의 왕세자의 시 소재가 되기도 했던 과일, 감귤류의 원생지는 동부 아라비아로부터 동쪽으로 필리핀까지, 히말라야산맥으로부터 남쪽으로 인도네시아 또는 호주까지를 포함하는 아시아 동남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넓은 지역 중에서도 인도 동북부와 미얀마 북부를 중심지로 믿어 왔는데 최근의 증거에 의하면 중국의 중남부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이 감귤의 생성과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제감귤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수인제(垂仁帝)의 명에 의해 서기 70년에 田道間守라는 사람이 상세국(尙世國)에서 비시향과(非時香果)를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비시향과는 감귤의 한 종류가 분명하며 상세국은 제주도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 구마모토현의 오랜 전설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三韓)에서 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심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감귤이 제주도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감귤 과수원 지도

  제주감귤에 대한 우니나라 역사 속 최초 기록은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고려 문종 6년(1052년)에 '탐라국에서 해마다 바치는 귤의 정량을 100포로 개정 결정한다'고 돼 있어 그 이전부터 감귤을 재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고려사』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서기 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을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고려태조 천수 8년(서기 925년) 겨울 11월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치다'를 시작으로 '방물을 바쳤다' '토물(土物)을 바쳤다'하는 기록이 계속되는데 정황상 감귤이 포함됐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감귤이 주요 공물로 관리되었습니다. 1526년 5곳의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했고, 1530년에는 과원이 30곳에 달했는데 중앙에서 요구하는 감귤의 진상 액수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704년 이형상 제주목사 시절에는 관에서 관리하는 과원이 42곳으로 늘어났습니다.
 세조실록 2권에는 '감귤은 종묘에 제사 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라는 기록하였으니 제주감귤은 매우 중요한 과일이었는데요. 감귤의 한자어 표기인 ‘柑橘’의 ‘감(柑)’은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제주산 토종 감귤인 홍귤을 뜻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호)에는 임금에게 진상할 감귤나무 과원의 모습이 담긴 ‘고원방고(羔園訪古)’나 감귤을 포장하는 ‘감귤봉진(柑橘封進)’ 등의 그림이 있습니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 18년)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각 고을을 돌며 기록한 채색 화첩으로 감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주도를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조선시대에도 기 맥이 이어진 것입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는데 성균관 유생에게 감귤을 하사하는 과거시험으로 제주감귤은 금귤로 대접받았습니다. 

국가차원에서 감귤을 관리했으며 진상하는 감귤의 종류도 유자, 당유자, 감자, 산귤, 청귤, 담금귤, 석금귤, 동정귤 등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귀한 과일이고 많은 감귤원이 조성됐음에도 나라에 바치는 귤의 수량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지방 관리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감귤 공납을 강요해 문제가 되었습니다. 관에서는 일반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해 관리했는데, 귤이 열리자마자 그 수를 장부에 기록했다가 나중에 그 수량만큼 공납하도록 귤나무 소유자에게 부과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수확시기까지 과실이 해충 또는 비바람에 상해 못쓰게 되더라도 무조건 수량을 채우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오히려 '고통을 주는 나무'라 했습니다. 그에 따라 사적인 용도를 위해 관리들까지도 이를 획득하기 위해 다툼이 심했으며 때로는 대신들 간에 감귤(柑橘)을 품에 넣어 서로 뺏고 뺏기는 일로 상소가 일어났으니 그들의 다툼만큼 감귤을 키워내야 하는 제주주민들의 고통은 배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도민들에게는 감귤 진상이 커다란 노역과 부담으로 작용하여 영조 때의 경우 감귤나무에 끓는 물을 부어 죽이는 일이 비일 비재할 만큼 관리들의 혹독한 수탈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감귤이 풍작이면 진상을 위하여 제주에서 한양까지의 운송도 어려움이 많아 거센 풍랑을 만나면 표류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운송 도중 감귤이 썩어버리면 심한 문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은 진상제도는 고종 31년(1893년)에 폐지되었고 제주도민들은 소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귤재배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편 조선 말기에서 일제 시대에 이르는 혼란기에 새로운 감귤 품종들이 제주에 들어왔으니 이른바 온주감귤입니다. 온주(溫州)는 중국 절강성 남동부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이 지역에서 유래된 감귤을 온주감귤이라 일컫습니다. 일본에서도 '온슈미캉'이라고 하는데 오래전에 온주감귤이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량종으로서의 온주감귤이 제주에 도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조선 말기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가 1907년(융희 원년) 9월부터 제주로 유배, 이후 3년 동안 머물면서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온주감귤 과수를 구남천(지금의 제주 구남동 일대)에서 식재해 관리했다고 합니다. 
 1911년 프랑스 출신 에밀리 타케(한국명 엄택기) 신부가 일본에서 온주감귤 15그루를 들여와 서귀포시 서홍동 홍로성당에 심었습니다. 당시 온주감귤 중 1그루가 최근까지 살아있었지만, 2019년 4월 고사했습니다. 따라서 에밀리 타케 신부가 들여온 귤나무가 제주에서 주로 재배하는 온주감귤의 시초로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지난 2011년 온주감귤 재배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려 했지만, 결국 백지화되었는데요. 제주에서 삼국시대부터 감귤을 재배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도 일본에서 들여온 온주감귤을 부각하는 행사를 열 경우 제주 감귤의 뿌리가 일본으로 잘못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제주 4·3, 6·25 전쟁 등 사회 혼란이 이어지면서 상품성 있는 감귤생산은 이뤄지지 않았고 감귤은 거의 야생화되었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 감귤은 제주에서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감귤값이 점차 비싸게 형성되면서 감귤 재배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1964년 2월에는 연두순시차 제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감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특별지시를 도지사에게 내린 것입니다. 1965년 '감귤증산 5개년 계획'이 수립됐고 감귤 재배는 급성장했으며 당시 일본산 감귤 묘목이 들어온 데 이어 '감귤 제주 이루자'는 구호 아래 감귤 증산대회가 열리고 '결혼 기념 감귤 심기 운동'까지 생겨나면서 학교에서도 소득작물로 감귤을 심었습니다. 1964년에 110㏊에 불과했던 재배 면적이 10년 후인 1974년에는 9천923㏊에 달하며 90배라는 초고속 성장을 했습니다. 이듬해인 1975년에는 재배 면적이 1만㏊를 넘어섰고 농가수입은 146억원대에 이르렀습니다. 감귤은 1960∼1970년대 다른 농작물에 비해 수입이 월등히 높아 집 정원에 몇 그루만 심으면 자녀의 학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로 불리는 등 제주의 주요 농산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오렌지 등 감귤류 수입개방과 제주 감귤의 품질 저하 문제 등 악재가 겹치면서 2000년대 들어 감귤 재배 면적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남쪽 지방에서 주로 나는 귤의 생산지가 기후변화 등으로 점차 북상하면서 최근에는 중부 지방인 경기도에서도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등 감귤이 제주의 전매특허라는 인식도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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