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 대한 제사, 사직단

2023. 5. 13. 21:4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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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이었습니다. 선조는 피난 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한 신하가 다급히 고했습니다. 바로 개성에 놓고 온 것이 있다는 것인데요.  대신들이 ‘그것’을 고하자 임금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사람들이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 군사들이 수도 한양을 압박해오자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그것’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고 명합니다. 당시 중요하게 여기던 것, 그리고 단 두 번 옮겨진 것은 종묘와 사직의 신주였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러한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을 생각하소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나 임금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려 할 때 늘 외치던 소리였습니다. 선왕의 신주를 모시던 곳이 바로 종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던 것이 사직이었습니다. 그 중에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킵니다. 두 신을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라고 하며 조선시대 사직단을 관장하던 관청은 사직서(社稷署)였습니다. 
“나라를 세우면 도성의 궁문 밖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을 세워야 한다.” 『주례』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 때가 바로 1394년 11월 2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약 1주일 뒤에 일이었습니다. 태조가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짓는 궁궐보다 선왕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인 종묘와 땅의 신과 곡신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먼저 지으라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종사를 보존한다.’는 말은 곧 ‘나라를 지킨다.’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사직단은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그믐에 지냈는데 그 내용으로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종묘사직은 중국 상나라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것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직단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 8년(391)에 사직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 선덕왕(宣德王) 대에도 단을 쌓아 사직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전 근대 사회에서 토지와 곡식은 그 자체가 지배적인 생산수단이면서 생산물이었습니다. 따라서 토지신과 곡물신에 대한 제사는 고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사직단은 정비되었습니다. 그리고 1897년에는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사직단은 태사단(太社檀)과 태직단(太稷檀)으로 높여졌고 위패도 이와 상응하게 고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가의 종묘제례가 명맥이 끊겼지만 한국의 종묘제례만이 2천년 넘게 그 명맥이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종묘와 사직은 오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숱한 위기를 이겨왔습니다. 
‘화재가 일어났다 하니, 돈과 식량이 들어 있는 창고는 구제할 수 없게 되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하여 구하도록 하라.’ 『세종실록』
큰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소헌왕후가 명한 것은 종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은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었고 곡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군사와 백성들은 종묘를 보호하기 위해 달라붙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의 위패를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위패를 모셔오도록 한 것은 조선왕조가 얼마나 종묘에 모신 위패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조선의 종묘는 무덤이 아니라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즉 혼을 모신 곳입니다. 종묘의 한자에는 무덤 묘(墓)가 아니고 사당 묘(廟)가 쓰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왕실에서 세자나 왕비를 뽑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결정을 하고난 뒤에는 꼭 고했다고 하며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계속 될 때에도 종묘에 도와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종묘가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곳이라면 사직단은 만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입니다. 그리하여 이곳은 종묘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임금은 이곳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습니다.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 앞에 머리를 조아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을 기원한 것은 왕조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직단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전국 곳곳에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 


사직단이 땅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으로는 환구단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에서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매년 큰 제사를 지냈고 그러한 곳이 다섯 곳이 있었습니다. 사직단이 제일 큰 규모를 자랑했으며 농업을 주관하는 신을 모시는 선농단과 잠업이 잘 되기를 기원하던 곳이 바로 선잠단, 그리고 제천행사를 하는 환구단, 그리고 희생된 영령을 위해 제사 지내던 곳이 바로 장충단입니다. 그 중에 환구단은 둥근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구단이라고 불렀는데요. 하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중국의 황제만이 지낼 수 있다고 중국에서 압력을 넣는 바람에 1465년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환구단이 부활하였습니다. 고종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경운궁 맞은편에 환구단을 만들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황제는 국호를 고치면서 연호를 ‘광무’로 정합니다. 그리고 환구단의 설치를 명합니다. 그리고 환구단의 위치를 정한 뒤 한 달 여 만에 환구단이 완공되었습니다. 이것이 대한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고 천자(天子)의 나라임을 선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조선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를 잃고 고종 자신도 암살위협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러시아 공사관에 1년 넘게 머물며 정사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사업권은 열강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고종은 안되겠다 싶어 제국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겠다는 목적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환구단이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베이징의 천단을 본떠 지은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만든 3층의 제단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천신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를 짓고, 주변에는 어재실과 행대청 석고각 등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구단은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시련이 시작되엇습니다. 일제는 환구단을 없앤 것입니다. 
‘원구단에 봉안하였던 위패는 수일 전에 매안(埋安)하였고, 사직단의 위패는 소화(燒火)하였다더라.’ -매일신보 1911년 2월 14일자-
 조선왕조의 사직은 그렇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을 지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재실과 행대청, 석고각 등도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환구단에 가면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정문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정문은 철도호텔 자리에 들어선 조선호텔이 1960년대에 재건축되면서 사라졌었는데 40여 년이 지난 2007년에 발견되어 다시 옮겨왔습니다. 당시 환구단 정문은 성북구 우이동의 한 시내버스 차고지 입구로 쓰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황궁우는 태조 고황제를 비롯한 조상신의 신주와 하늘 땅을 다스리는 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왕실과 관련된 곳을 격하시키는 작업을 했는데요.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가 있던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고 덕수궁의 절반을 공원용지로 분리시켜 중앙공원으로 만들고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창경원으로, 그리고 사직단은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만 종묘의 위엄에 일본인들도 감탄하며 이는 건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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