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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 1384년(홍무 17)에 전라도 익산에서 함경도 안변으로 옮겨와 머물던 이성계는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고, 1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허름한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어지는 꿈이었습니다. 꿈이 이상해서 이웃 노파에게 물으니, 노파는 설봉산 토굴에서 9년째 솔잎을 먹으며 좌선하고 있는 무학대사에게 가 보라고 했습니다. 무학대사는 그것이 국왕이 될 꿈이라고 했습니다. 1만 집의 닭이 일시에 울었으니, 닭 울음소리 ‘고귀위(高貴位)’는 ‘높고 귀한 자리’에 오름을 뜻합니다. 1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울렸으니, 다듬이 소리 ‘어근당(御近當)’은 ‘임금 자리에 가까이 감’을 말..
2024.06.03 -
무신정변의 주인공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나.
1170년에 고려 시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1170년에 시작된 무신정변 이후 주동자들인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에 의해 무신정권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171년에 이의방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던 이고와 그의 동료 채원 등을 싸그리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나갔습니다. 그럼 이 시기에 무신들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과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쭉 이어져온 것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불만을 일시에 폭발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전 왕조의 왕이나 왕족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반대로 시해자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됩니다. 실제로 의종을 살해..
2024.05.29 -
고려의 왕자들은 왜 승려가 되었나.
고려는 그야말로 불교의 나라였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들이 지배층을 이르고 있었고 태조 왕건은 불교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일단 고려를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종교가 불교의 선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태조가 남긴 글인 훈요 10조만 봐도 불교와 관련된 행사인 연등회나 팔관회를 중시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광종 때 과거제를 실시하였는데 승과가 있었습니다. 이 때 뽑힌 승려는 나라의 스승인 국사나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되어 왕실의 고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절에 땅을 하사하고 스님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권을 부여해주면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줬습니다. 고려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배층이 문벌귀족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유행한 불교의 종파가 교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
2024.05.26 -
무신정권 때 농민봉기는 어떤 성격이었나.
고려 무신정권 시기 이 때에 민란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무신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습니다.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습니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습니다. 명종 때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망소이가, 운문, 초전에서는 김사미, 효심이 봉기하였습니다.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2024.05.23 -
고려 의종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인한 여러 가지 영향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개경파는 서경파를 억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연루되지 않은 인물이나 서경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예로 반란에 관여한 자의 이마에 ‘서경역적’이라는 문신을 새기고, 그보다 덜한 관여자에게는 ‘서경’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서경을 중시하라 했지만, 이제는 수도 서경은 마치 반역자의 땅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개경파만 남은 고려 조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습니다. 스스로 썩어가더니 마침내 무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을 맞이한 왕은 고려 의종입니다. 역사적으로 의종..
2024.05.19 -
고려는 왜 도읍을 옮기려 했을까.
도선(道詵, 827~898년)국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풍수지리설을 주장했던 최초의 인물입니다. 영암 출신으로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옥룡자’라고도 하며 ‘도승(道乘)’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15세에 출가해 월유산(현 지리산) 화엄사에서 을 공부하고, 850년 23세 때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20세 무렵, 846년 동리산문 혜철선사의 제자가 되어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도선은 스승에게서 심인을 얻은 뒤 운봉산과 태백산 등지에서 정진하며,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15년 정도 행각한 후 37세 무렵, 희양현 백계산에 이르러 고옥령사를 재건했습니다. 도선은 동리산문 태안사와는 다른 선풍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리산문은 ..
202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