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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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초기 명장 석우로
신라 초기에는 왕이 있었으나 친위대는 없었다고 합니다. 친족과 예속민으로 구성된 병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력부대는 육부의 주요 씨족들과 그 예속민들로 구성된 부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나해 이사금은 다른 육부의 눈치를 살펴야 했습니다. 신라 근처에 낙랑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신라보다 더 발전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왕은 낙랑에게서 선물 받은 것으로 몸을 치장하였고 이를 통해 신라의 통치권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조분이사금은 신라 11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제9대 벌휴 이사금의 장남이었던 석골정의 장남입니다. 내해 이사금(제10대)이 비록 차남 석이매의 아들이라 순서에서 밀리지만 백부인 석골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조분 이사금은 내해 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
2023.09.28 -
신라 3대 왕 유리 이사금
신라의 3대 왕은 유리 이사금입니다.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으로 비(妃)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유리 이사금은 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첫 번째 왕으로 이사금이라는 명칭은 3대 유리 이사금 때부터 16대까지지 사용하였습니다. 이사금은 ‘치리(齒理)’, 즉 ‘이의 자국’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전 임금인 남해 차차웅이 사망할 때에 탈해와 유리 둘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 위를 이으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연장자가 왕위를 이으라는 것인데요. 연장자가 지배자로 정하는 것은 상고시대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상..
2023.09.27 -
거서간 다음은 남해 차차웅
남해 차차웅은 신라 제 2대 국왕으로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 부인의 아들입니다. 제 1대 박 혁거세와는 달리 남해에게는 차차웅이라는 명칭이 붙었는데요.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故畏敬之)”고 했습니다. 이는 신라왕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제사장의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반론도 있는데요.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에 의해 통일되고 황제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제정일치 사회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개국시점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였는데 그 시점에서도 과연 제정일치 사회였을까하는 것은..
2023.09.26 -
박혁거세 이야기
신라를 세운 사람은 박혁거세입니다. 고대국가의 시조가 다 그렇듯 박혁거세도 믿기 힘든 설화를 담고 있는데요. 큰 박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 하여 박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그 자체가 귀인으로 여겨질 수 있는데요. 박혁거세 거서간에서 거서간은 진한 사람들의 말로 왕이란 뜻으로 혹은 귀인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거서간은 1대인 박혁거세에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박혁거세의 성이 박씨라고는 하나 당시 성씨의 개념은 없었습니다. 이름만으로 자신을 나타냈을 뿐입니다. 6세기까지 만들어진 신라의 금석문 자료에 지배층의 성씨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양서(梁書)』 신라전에는 521년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법흥왕을 ‘모진(募秦)’이라고 기록하였는데..
2023.09.25 -
김춘추는 민족반역자인가, 삼국통일의 주역인가.
642년 고구려의 평양에서 중요한 회담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과 신라에서 건너온 사신 김춘추의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김춘추는 왜 고구려로 사신으로 건너갔을까. 그보다 1년 전인 641년 백제 31대 왕인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합니다. 이것은 선대 왕인 성왕이 신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당시 백제는 신라에 대한 침략으로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침략의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신라가 빼앗고 이후 성왕의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마당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었으니 백제와 신라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아니 서로 칼을 겨눠야..
2023.01.17 -
신라의 수준높은 공예 감은사 사리함
신라의 수도 경주시에는 아주 예전에 감은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이 절은 31대 신문왕이 선대 왕인 문무왕을 위하여 지은 절로 문무대왕은 일본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이 절을 짓다가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어 용이 되었다고 하며 신문왕은 682년에 즉위하여 내부장치를 마쳤다고 합니다. “문무왕이 왜병 진압을 위해 이 절을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2년(開耀·682년) 공사를 끝냈다. ‘금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는데(排金堂●下東向開一穴)’ 이 구멍으로 용(문무왕)이 금당으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였다. 왕이 내린 유조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했고,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 했다.” 『삼국유사』 “박숙청이 아뢰었다..
202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