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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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아들 경종과 노론
숙종의 다음 20대 조선의 임금은 바로 경종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경종이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경종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숙종은 27살이라는 나이였습니다. 다소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라 100일도 안된 시점에 원자 책봉을 받았고 3살 때에는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숙종에게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어머니 장희빈의 권세가 대단하였고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과 연령군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때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면서 그는 서자에서 적장자의 신분으로 격상되었으니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기록에서 보이는 경종은 밝았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신하들이 서로 가지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무수한 ..
2023.03.05 -
장희빈과 숙종
우리나라 역사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의 여주인공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스토리를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장희빈일 것입니다. 장희빈과 관련된 드라마만 여러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장희빈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로 이름은 옥정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역관출신의 장형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입니다. 장옥정의 아버지가 역관이므로 장희빈은 상당한 재력가의 딸이었습니다. 장희빈 이전에 숙종에게 왕비가 있었으니 첫 번째는 인경왕후였습니다. 그는 1671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674년에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낳은 두 딸은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도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그 때가 불과 20살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숙..
2023.03.04 -
조선 숙종의 왕권 유지 방법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현종의 외아들로 모후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라고 합니다. 숙종은 1674년 ~ 1720년까지 왕으로 있었으니 이것은 조선 역대 왕들 중 두 번째로 긴 기간입니다. 첫 번째는 숙종 다음인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가 52년간이었습니다. 숙종이 한 일중에 단종을 복권한 일이 있습니다. 단종은 폐위된 이후에 상당 기간 대군도 아니고 노산군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단종이라는 묘호를 내립니다. 숙종 대에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사림파의 두 분파인 남인과 서인이 대결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서인당을 중심으로 단종복권운동이 재개되었습니다. 그러면 숙종은 왜..
2023.03.03 -
대동법 시행을 외친 김육
조선시대에 농민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세, 역, 공납으로 공납은 공물이라고 합니다. 전세는 토지세로 아무래도 토지를 가지고 있는 양반들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역에는 군역과 요역이 있으며 군역은 병역의 의무를 지는 것, 요역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공물은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것으로 시간이 갈수록 이 공물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물에는 제철 채소와 과일 그리고 해삼, 전복, 상어, 문어같은 진귀한 해산물과 담비 가죽과 표범가죽, 그리고 사슴가죽 여기에 종이와 그릇, 휴지같은 가내수공업품까지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물을 바치는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바쳐야 하는데 나지 않는 경우..
2023.03.02 -
인조는 소현세자를 싫어했나.
조선왕실에서는 몇몇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소현세자의 죽음일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8년간 인질로 끌려가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삼전도의 예를 행한 후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8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지 2달 만인 1648년 4월 사망하였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며칠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조선왕조실록』 이..
2023.03.01 -
병자호란의 싸움 쌍령전투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다시 한 번 외적의 침략에 의한 난리를 겪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 과연 피할 수 없던 전쟁이었나. 사실 생각해보면 그건 쉽지 않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인조반정의 이유에는 바로 광해군가 중립외교를 했다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후금의 전력을 명나라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하고 세계관이 성리학이었고 따라서 조선에게 임진왜란 때 파병해준 명나라 대신 후금과 친하게 지내라는 것은 어쩌면 어려운 부탁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의 정책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현실적이지 못했고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국제적인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친명배금정책이라는 현실과 거리가 있는 외교노선을 고집..
2023.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