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85)
-
조선의 왕세자교육과 사대부의 손자교육일기 양아록
조선시대에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높았습니다. 특히 궁궐에서도 세자를 위한 학습이 마련되었는데 일종의 예비 제왕을 가르치는 훈련이었습니다. 일단 세자에 대한 조기교육은 3세때까지 보양청이라는 곳에서 맡았습니다. 이곳의 실무 보양관 10여명이 세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가르친 것입니다. 정조는 세손시절에 붓과 먹을 가지고 놀며 책을 읽는 흉내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효자와 공자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보며 흉내내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중종의 원자는 만 2살 때에 『천자문』과 『유합(類合):한문학습서』를 절반이나 외워 중종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양청에서 교육을 받은 세자는 강학청이란 곳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이 곳에서 세자와 스승간의 상..
2023.02.14 -
조선의 해외파병 나선정벌
우리나라가 서양세력과 충돌을 일으킨 것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던 개항하기 직전이 최초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앞서 우리나라는 서양의 세력과 군사적 충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군과 맞닥뜨린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임금은 효종이었습니다. 효종은 1649년에서 1659년까지 조선의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시 조선군이 러시아군과 싸웠던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 당시 효종은 우리에게 북벌론을 추구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조로 바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던 임금입니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아마 8년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볼모생활을 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간 그는 조선의 군사력..
2023.01.31 -
중립외교의 광해군과 친명배금의 인조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다시 한 번 커다란 난리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은 인조였습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인조는 광해군을 왜 몰아냈을까. 사실 알고 보면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당시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을 잘 이끌었던 당시 세자였습니다. 그는 국난 당시 흔들리던 민심을 수습하고 왕실을 권위를 되찾는데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세자 시절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은 ‘행동을 조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중외 백성들의 마음이 복속하였으므로 선조가 가려서 세웠다.’라고 기록하였으니 그에게는 일찍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위기상황 속에서 조정의 대신들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후계자를 선택해야 한다..
2023.01.30 -
백두산 정계비와 영토분쟁
간도란 곳이 있습니다. 청이 이 지역에 대해 조선인과 청나라인 모두 들어갈 수 없도록 봉금지역으로 정하고 나서 섬과 같은 땅이라는 의미로 간도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잇고 조선사람들이 이 곳에 건너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간토라고 하였는데 이후에 간도라고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러던 1880년대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습니다. 1712년에 국경 답사 후 세웠던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문구 때문인데 압록이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압록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토문입니다. 청나라는 이것에 대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조선은 이에 대해 쑹화강 지류로 보는 것입니다. 간도에 대해서 조선은 예로부터 우리들의 영토라 생각했고 청나라는..
2023.01.13 -
정조의 죽음은 독살 때문일까.
"이날 유시(酉時)에 상(정조)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정조실록 中 1800년 정조가 병상에 누운지 보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종 이후 성군이라 불리던 조선의 왕이었고 당시 세계사는 근대화를 물결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군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왕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정조의 죽음은 조선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망국의 길로 가는 하나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는..
2023.01.12 -
초량왜관은 어떤 곳이었을까.
초량왜관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 1607년(선조 40) 조성된 두모포 왜관에 이은 네 번째 왜관으로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된 곳입니다. 이 곳은 임진왜란 이후 전쟁의 상처로 양국 간에는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그렇다고 가까운 두 나라가 마냥 연을 끊고만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설치된 것이 바로 왜관입니다. 이러한 왜관은 조선초기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왜관의 설치는 일방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왜관이 있으면 일본에도 조선관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왜관 설치는 왜구출몰에 의한 회유책이었습니다. 당시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라 여겼으며 이 곳은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렵고 무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
2023.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