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는 어떤 역사가 있을까

2023. 6. 12. 19:1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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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 가꾸다’에 실린 그림 중에서 영조가 수문 위에서 청계천 준설 공사를 친히 내려다보는 풍경. 군인과 평민들이 소를 동원해 개천의 바닥을 파는 공사를 벌이고 있다.

청계천은 서울의 도시개발 역사를 상징하는 하천으로  2003년 7월 1일 착공하여 2005년 10월 1일 완공하는 사이 이슈가 되었고 이후로는 서울 도심지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청계천의 조선시대 이름은 ‘개천(開川)’ 이었습니다. 선시대에 청계천은 개천이라고 불렸으며, 천계천은 한양 도성의 중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백성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청계천은 도성의 내부를 둘로 나누었으며, 북쪽으로는 궁궐, 종묘, 사직, 주요 관청들이 있었고, 남쪽에는 중 하류층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청계천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데, 나라의 허락을 받아 물건을 파는 사람들, 아픈 사람을 고치는 한의원, 다른 나라말을 통역하는 역관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청계천은 양반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초기에 서울의 지명을 개정할 때 청계천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청계천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물줄기가 흘러서 모이는 하천입니다. 중랑천을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는데 총 길이는 총 길이는 3.6㎞에 달합니다. 
하지만 청계천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천범람이 그 문제였습니다. 옛날 도시를 흐르는 하천은 물류 교통과 더불어 하수배출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수도로 한양이 결정된 것은 한강을 끼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청계천 물난리가 잦자 태종 11년(1411년)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 해 대규모 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이후 1760년 영조 36년에 20만 명의 인원이 동원돼 57일간 개천의 폭을 넓히고 양변에 석축을 마련하고 수로를 직선화해 현재 청계천 수로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조는 80 평생  한 3가지 일 중의 하나가 준천이라고 말할 정도로 개천의 준설과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이후 개천 준설작업은 영조의 준천을 표준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청계천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공적으로 조성된 하천이었습니다. 
엊지되었든 청계천의 범람 문제는  건국초에 간파되었고 태종 대에 청계천 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해마다 장마 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되어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 -태종-


. 1406년(태종 6) 1월 16일 충청도와 강원도 정부(丁夫) 3,000명이 도성에 이르자, 덕수궁과 창덕궁에 각각 1,000명씩을 부역하게 하고, 한성부에 소속된 600명으로 하여금, 개천을 파는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하천을 파는 공사가 끝났다. 장의동(藏義洞) 부터 종묘동(宗廟洞) 까지 문소전과 창덕궁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을 만들고, 대·소 광통교와 혜정교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와 신화방(神化坊) 등의 다리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썼다.” 『조선왕조실록』
1412년에는 공사 주관 본부인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였고, 삼남 지방의 역군(役軍)까지 동원하여 1개월 여 만에 공사를 완공하였습니다. 
한편 청계천은 비가 적은 시기에는 건천지만 우기에는 홍수가 날 정도로 유량이 큰 하천이므로 세종은 이곳에 수표를 설치하여 수위를 측정하게 하였습니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상략)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구리[鐵鉤]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촌(寸)·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우수(雨水)의 천심 분수(分數)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소서.(하략)’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대의 수표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로 수표를 만들게 된 것은 재료를 다듬어 수표를 만들기가 수월하고 눈금과 글자를 새기기가 쉬웠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영조대에 이르러 청계천 준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농촌의 인구가 서울로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청계천은 폭발하는 인구로 인해 발생하는 하수와 오물처리에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조는 이번 기회에 홍수피해를 방지하는 한편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하였습니다.
 57일 간의 공사 기간에 21만 5,000여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시전(市廛)의 상인,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000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에 3만 5,000냥의 돈과 쌀 2,300여 석(石)의 물자가 소요되었습니다. 이전에 준설사업에 대한 예상 인력은 최소 50~100만 명이었고 재정 또한 최소 수십 만 냥으로 잡았지만 시간과 비용을 아낀 영조의 비법이 있었습니다.
‘백성을 만나 직접 만나 여론을 수집하고 소통하라.’

1965년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하는 모습.'

 일제강점기 청계천은 이전과 여러모로 다른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일단 조선 역사 내내 ‘개천’이라 불리던 것에서 ‘청계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청계천’이라 불리던 시점은 정확하지 않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의 하천명칭들이 정리되면서 개정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16년경부터는 신문에 개천이라는 말 대신에 청계천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거리 종로(鐘路)'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本町〕'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곧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차별의 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이름에서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북쪽은 '동(洞)'과 같은 전래의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은 '혼마찌(本町, 지금의 명동)'과 같은 일본식 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한 신문에는 "북부(청계천 북쪽)일대에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지마는 본정(本町) 일대는 길에 밥이 떨어져도 주워 먹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청계천은 그냥 방치되는 바람에 이름 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고 일본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따라서 청계천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보건과 위생에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조선 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의 하나로 시작되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여러차례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하였으며 추가적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무산되고  실제 복개가 이루어진 것은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었습니다.
이유는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모든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고 따라서 청계천 준설을 비롯한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해방을 즈음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며 청계천에 대한 정비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이대로 방치할 수 없어 당시 택한 방법이 바로 복개였습니다. 청계천 주변의 판자집이 헐리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청계천은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이곳에서 강제이주당한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에서 달동네를 형성하였습니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에 청계천 복원이 이루어졌지만 촉박한 일정으로 인해 문화재 발굴과 복원은 어려웠고 청계천이 아름다운 생태 하천 복원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숙제가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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