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공론정치와 만인소
2023. 6. 15. 18:1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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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왕이 존재하는 전제국가이지만 여론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집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심이 함께 옳다 하는 것을 공론(公論)이라 하며, 공론의 소재를 국시(國是)라 합니다. 국시란 한 나라의 사람이 의논하지 아니하고도 함께 옳다 하는 것이니 이익으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며, 위엄으로 무섭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삼척동자도 그 옳은 것을 아는 것이 곧 국시입니다.” -율곡이 대사간 직을 사양하며 선조에게 올린 상소 중-
율곡은 정치를 소통으로 보았으며 실제 조선 조정에서도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라는 삼사(三司)를 두어 이곳에 속한 관원들이 왕의 잘못이나 언행, 정책을 비판하고 사정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성리학을 공부하는 재야의 지식인들인 유생들도 공론형성의 한 축을 맡았습니다. 조선 초기에서는 이들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성종 이후 사림이 정계에 등장하면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론이라는 것이 ‘국가 공공의 의논’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언론 혹은 여론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으나 다수의 견해라기보다는 한 계층의 의견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중종 때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습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선왕인 성종 때에 거행한 행사라는 이유로 불교식 제사인 기신재를 복구시킵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 지식인이 등장하여 영향력을 점차 넓혀나가는 중에 이들은 당연히 불교 행사인 기신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합니다. 사림파 계열 대신들이 몇 년에 걸쳐 건의했음에도 국왕이 듣지 않자,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나섭니다. 하지만 국왕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립니다.
“전하의 그 말씀으로 인해 행여 이 나라를 잃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공론이 있는 곳에는 초야의 천한 사람 말이라도 가볍게 여길 수 없고, 공론이 없는 곳에서는 조정의 높은 대신 말이라도 무겁게 여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구제하는데 있을 따름입니다.”
여기서도 공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요. 성균관 유생들의 의견이 민심을 반영하는지는 미지수이고 그보다 국가의 흥망이나 유학의 성쇠와 같은 대의명분과 관련하여 공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이전 시대보다 국왕이나 신하,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국정을 운영하며, 언론의 따가운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공론정치를 대표하는 상소는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이 올리는 관소와 지방 향교나 서원, 각 행정단위에 거주하는 유생들이 올리는 유소가 있었으며 이들은 때로 연합하여 연합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승정원을 거쳐 국왕에게 전달되었는데, 특히 성균관 유생이 올린 상소에는 국왕이 직접 답변을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유생들은 현직관리들은 아니지만 공론을 형성하는 주체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의 붕당은 공론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며, 공론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는 정치집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론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붕당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며 이는 특정정치집단의 독점을 막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생들의 상소는 책임도 뒤따랐습니다. 유배는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공론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균관에서 상소할 일이 생기면 학생자치회인 재회를 열거나 식당과 반촌 등지에 모여 상소를 올리기 위한 뜻을 확인하고 학생회장인 장의의 동의를 얻습니다. 이후 도성의 4부학당과 지방의 향교, 서원 등에 상소 취지 통문을 올립니다. 그리고 명륜당에서 상소의 대표자인 소두를 선발하였는데 이 자리는 나중에 관직에 진출하면 경력으로 활용될 수 있으나 처벌도 감수해야 자리입니다. 그리고 임원진을 차린 후 상소문이 작성되고 승정원에게 전달하고 승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전달된 상소문에 대해 어떠하든 답을 내려주어야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랬으나 비답을 내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비답을 받아들이거나 유생들을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상소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유생들은 대궐 앞에서 연좌농성을 이어가며 상소문을 제출하고 수업을 거부하는 권당이나 동맹휴학이라고 하는 공관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영조 때에는 빗발치는 상소를 제어할 목적으로 일반 유생의 상소는 성균관 장의의 확인을 받게 했습니다. 그것이 영조 개인의 의지였다기보다는 역시나 붕당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장치를 근실이라고 했습니다. 근실의 시행으로 정치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유림은 더욱 더 자신들의 뜻을 임금에게 알리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언로의 열세를 타개키 위해 등장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만인소입니다. 만 사람의 뜻은 곧 천하사람 모두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보인 것입니다.
만인소는 총 7차례가 있었으며, 최초의 명실상부한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에 나왔습니다. 당시 유학(幼學) 이우(李㙖)를 소두(疏頭)로 한 영남 유생 1만 57인(2차 상소 때는 1만 368인으로 늘어남.)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伸寃)을 위해 연명 상소하였습니다. 정조 앞으로 불려 간 이우가 상소문을 읽어나가자 정조는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인원이 더 늘어난 2차 상소도 마찬가지였고 1792년 조선 최초의 대규모 집단 청원인 ‘만인소(萬人疏)’는 그렇게 마쳤습니다.
7차례의 '만인소' 가운데 5차례의 상소운동을 영남지역을 근거로 했던 영남유생들이 주도했습니다. '서얼 차별 철폐 만인소'(1823년)는 9천996명,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1855년)는 1만94명이 연명했습니다. 또, '서원 훼철 반대 만인소'(1871년·고종 8)는 1만27명, '대원군 봉환 만인소'(1875년·고종 12)와 '척사 만인소'(1880년·고종 17)가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1884년·고종 21)에는 8천849명의 영남 유생이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만인소는 조선이 표방하는 소통정치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 기록될만큼 역사적인 기록물이지만 만인소는 성공한 사례보다 실패가 더 많았습니다. 일곱 차례의 만인소 중 정책에 영향을 준 것은 영남 만인소 사건 단 한 번이고 순조 때의 서얼 차별 철폐, 대원군 집권 시기의 서원 철폐 반대 등 나머지 여섯 건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당시의 만인소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거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871년 10027명의 영남유생들이 ‘서원 훼철 반대만인소’가 나옵니다. 유생들은 ‘국가의 안위는 영남의 존망에 달려있고 영남의 존망은 서원을 철폐하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다.’며 반대입장을 표명했지만 이는 자신들의 존립과 기득권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의 철폐를 두고 볼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를 반대하는 ‘대원군 봉환 만인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고종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 일로 인해 관련 유생들이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만인소는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남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열세를 ‘공론’이라는 형식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중 받아들여진 것은 ‘영남만인소’로 1881년 영남지방의 유생 1만여 명이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낸 상소였습니다. 이 만인소로 인해 김홍집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조선책략'을 근거로 한 외교정책을 철회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만인소를 통해 소통의 창구를 마련해놓았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국왕에게 있었다는 점, 만인소를 올린 주체가 성리학적 질서를 고수하고 문호개방을 해야 했던 당시의 흐름을 역행하는 의견이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되지만 이것도 역시 공론정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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