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당 이씨의 태교신기

2023. 6. 21. 18:5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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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조선시대 태교와 영유아 교육의 대가인 '사주당 이씨'를 기리고, 유교 관광문화시설로 가꾸기 위한 '청주 사주당 태교랜드' 조성사업에 대한 뉴스가 나왔습니다.  청주시에 따르면 청원구 내수읍 우산리 46 일대 사주당 태교랜드가 조성되며 총사업비 187억원으로 내년 8월에 착공, 오는 2023년 12월 준공될 예정으로 정부사업비에는 38억원이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주당이란 누구일까.
사주당 이씨는 세계 최초 태교 전문서 『태교신기』를 집필하였습니다. 사주당 이씨가 살았던 1800년 전후는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주당 이씨는 사회가 부여한 여성성에 충실하면서도 사회가 정한 선을 넘어 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책을 남긴 것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태교가 있었고 관련 서적도 있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유향이편찬한 『열녀전』에는 주나라를 세운 문왕의 어머니 태임의 태교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유향은 ‘태임이 문왕을 임신하였을 때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나쁜 음악을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왕실에서는 태교를 매우 중요시하여 다음에 왕이 될 왕자가 태아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면 훌륭한 자질을 갖고 태어날 것으로 기대했으니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남겼습니다.
"선비(先妣)께서는 성종의 배필로 곤전(坤殿)의 지위를 내전에서 바로하고, 국모로서의 예를 육궁(六宮)에서 본보이셨다. 또 나를 가지면서 일찍이 태교(胎敎)를 잘 하시었다.“ 『연산군일기 10년 5월 6일』
또한 『태산요록』은 세종이 의학자인 노중례로 하여금 편찬하도록 한 의서로 임신 이후 태교와 임산부의 보호, 출산 후 영아를 다루는 법, 영아의 질병과 치료 등의 내용을 담아 임신한 여성과 태아를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태교신기』는 청주 출신의 사주당 이씨(1739~1821)가 1800년 1남 3녀 4남매를 키우는 과정 속에 자신이 겪은 임신·육아의 경험과 경서 및 의서 등에 기초해 저술 한 것입니다. 태교의 이치와 태교 지침, 태교의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후 아들 유희가 한문으로 쓰인 글에 음의와 언해를 붙여 1801년 펴냈습니다. 
“태교가 기본(本)이고 스승의 가르침은 끝(末)이다.(胎敎爲本 師敎爲末) /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며(父生之 母育之) / 스승의 가르침은 모두 한 가지다.(師敎之一也) / 의술을 잘하는 자는 병들지 아니하였을 때 다스리고(善醫者 治於未病) / 잘 가르치는 자는 태어나기 전에 가르친다.(善斅者 斅於未生) / 그런 까닭에 스승의 십년 가르치심이(故 師敎十年) / 어머니 열 달 기르심만 못하고(未若母十月之育) / 어머니 열 달 기르심은 (母育十月) / 아버지 하루 낳아주심만 못하다.(未若父一日之生)”
책에서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10년보다 중요한 것이 어머니 뱃속에서의 열 달이며 부모가 아이를 갖기 이전부터 바른 마음을 가져야 잉태된 아이가 바르고 훌륭한 사람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사주당 이씨는 25살에 당시 용인에 살던 46세의 유한규와 혼인했으며 62세에 네 자녀를 낳아 키운 경험과 학문 등을 토대로 『태교신기』를 집필했습니다. 20살의 나이차에도 유한규와 사주당 부부는 함께 학문을 토론했고, 남편은 아내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사주당 이씨 스스로도 학문을 향한 열망이 컸는데 원래 당호는 희현당이었는데 나중에 사주당으로 고칩니다. 이는 ‘최고의 성리학자인 주자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의미로 사주당 이씨 스스로가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적 노습이 갇히지 않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나아가겟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주당의 가계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태종의 아들 경령군(敬寧君)의 후손이었으나, 조부 이함부(李咸溥)는 이렇다 할 벼슬에 오르지 못했고, 부친 이창식도 통덕랑의 직함만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 현달하지는 못했어도 학덕이 있고 청렴한 선비의 덕성을 지닌 인물들로, 사주당의 지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남편 목천 현감 유한규(柳漢奎)는 세 번이나 아내를 잃었고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중 이사주당의 덕행과 높은 학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녀의 총명함과 인품을 흠모, 혼인을 청하게 됐고 과연 이사주당은 결혼 후 정신이 흐린 늙은 어머니를 지성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또한 1남3녀의 자식들에 대해 태교부터 시작해 가르침도 남달랐으며 그의 아들은 후에 『언문지』를 쓰는 유희라고 합니다. 아들 유희는 네살 때 한자를 깨우치고 일곱 살 때는 지식인들도 보기 어려운 '성리대전'을 통독했다고 하며 그의 세 딸도 역시 유복한 생활을 했으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데 정진했다고 합니다. 사주당은 남편과도 사이가 돈독했다고 합니다. 부부는 많은 나이차에도 결혼 생활 30년 동안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학문을 토론하며 일상의 재미를 함께 나누는 친구였으며 종종 유교 경전에 대해 사주당이 질문하면 그가 대답해주었고 간혹 떨어져 지내더라도 각자의 생활을 편지로 주고받으며 소식을 전할 정도로 금슬이 좋았습니다. 
사주당은 45살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용인으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남편이 살아있을 적에도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으니 용인으로 간다고 해도 어려운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데도 4남매 모두 글공부를 시켰고, 딸들의 경우에는 『태교신기』에 발문을 쓸 정도였습니다. 

『태교신기』를 집필할 당시 조선은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의 방법론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학분위기와 사주당은 자신의 경험을 넣어 태교에 관한 이론을 집대성하고자 한 것입니다. 『태교신기』는 총 10개의 장과 서른 다섯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장은 자식의 기질의 병은 부모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을 태교의 이치로서 밝히고 2장에서는 여러 가지 사례를 인용하여 태교의 효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옛 사람은 태교를 잘하여 자식이 어질었고 오늘날 사람들은 태교가 부족하여 그 자식들이 불초 하다는 것을 말하며 태교의 중요성 강조하고 있으며 4장은  태교의 대단과 목견,이문,시청,거처,거양,행립,침기 등 태교의 방법을 설명하여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5장은 태교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며 태교를 반드시 행하도록 권하고 있으며 6장에서는 태교를 행하지 않으면 해가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미신, 사술에 현혹됨을 경계하여 태에 유익함을 설명하며 8장에서는 여러가지 것들을 인용하여 태교의 이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옛사람들이 일찍이 행한 일을 인용하며 10장에서는 태교의 근본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대에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태교가 한때 전통적인 것, 혹은 '미신'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전문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태교문화가 단절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태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산부인과·뇌과학 등 현대 의학이 제안하는 태교방법과 사주당의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태교의 주체를 임부만의 일로 치부하지 않았습니다. 온가족이 참여해야 하는 일로 확장시킨 것인데요. ‘태를 기르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사람이 항상 거동을 조심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주당은 1821년(순조 21) 83세의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들 유희에게 자신이 지은 모든 글들을 태우고 『태교신기』만 남겨둘 것을 유언했습니다. 유희는 사주당의 유언에 따라 이 책만을 남겨두고 그녀의 모든 작품들을 모두 불살랐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학자가 생을 마감하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책은 『태교신기』였을 만큼 이 책을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다른 책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길래 모두 없애라고 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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