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속의 술

2023. 6. 25. 17:1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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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접객도

인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술이요 신과 접선하는 자리인 제사상에는 각종 음식과 함께 술이 올라갑니다. 부디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도 술은 함께 해 왔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술은 과일주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과일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술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일에 상처가 나면 과즙이 나오고 이것이 껍질에 있는 천연효모와 작용하여 과즙 속 당분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농경시대가 되면서 곡식으로 빚은 곡물 양조주가 생겨났으며 우리나라 술도 과일주보다는 국물주의 전통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사에도 올라가는 것이 술이니만큼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술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의 탄생설화에서 술이 등장하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하백의 세 딸을 초대하여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하였더니 다른 딸들은 달아나고 큰 딸 유화만이 남아 해모수와 인연을 맺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술은 불교나 유교처럼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술과 관련한 발효문화는 우리 민족의 특출난 장기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생각보다 꽤 오래전인 고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술과 함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우리나라에서는 곡물주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전인 마한(馬韓)시대부터 수확 후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다만 이 곡물주가 쌀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저 잡곡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고려에는 찹쌀이 없어 멥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으며 술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고려도경』
이 기록을 보면 고려에서는 멥쌀만 재배했고 그것을 이용해 술을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처럼 찹쌀로 만든 술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당시 고려에는 찹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려에서 쌀을 이용한 술을 빚었다면 아마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도 쌀을 이용한 술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장담그기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이때 이미 술누룩酒鞠과 곡아(穀蛾)로 술을 빚는방법이 완성되었으며 이러한 고구려의 주조기술은 중국으로 건너가 곡아주라는 명주를 잉태하고 고구려의 양조기술을 이어받은 낙랑주법이 신라사회에 뿌리를 내려 신라주가 당대 운사들에게 애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백제사람 안번(수수보리)이 누룩을 이용한 술 빚는 기술을 전해와, 왕이 이 술을 마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며, 인번을 주신(酒神)으로 모셨다.’ 일본의 『고사기』
위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백제인 수수보리가 일본에 누룩과 술 빚는 법을 전함으로써 비로소 일본에 술다운 술이 생겼다고 합니다.
‘한잔 신라주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스러질까 두럽구나’ -당대시인 이상은-
신라의 술은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며 해동역사에 나오는 고려주가 바로 신라주라 하였습니다.

소줏고리 증류기

고려시대가 되면 전대의 곡주류 양조법은 이미 완성되어 고려전기 중에 청주류, 중양주류, 탁주류, 재주류, 감주류 등의 양조기술가 종류가 많아집니다. 고려시대에도 송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고 사원에서는 여관업을 겸하여 술을 빚어 팔기도 했습니다. 한편 궁중의 양온서(궁중에서 술을 빚던 관청, 후에 장예서, 사온서로 명칭이 바뀜)에서도 국가의식용 술을 빚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려사람은 술을 즐긴다. 그러나 서민들은 양온서에서 빚는 그러한 좋은 술을 먹기 어려워 맛이 박하고빛깔이 짙은 것을 마신다.’
현대 한국사람들이 많이 먹는 소주도 고려 때 들어옵니다. 외지(外地)에서 전래된 소주를 일명 아라키주[亞刺吉酒]라 불렀는데, 이는 증류주의 발생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페르시아에서 처음 발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골인[蒙古人]이 페르시아의 이슬람교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증류방식에 의한 술을 함께 들여왔습니다. 이러한 증류주를 아랍어로 아라그라 하고 몽골어로 아라키라하였는데  만주어로는 '알키', 한국에서는 '아락주'라 하였습니다. 지금도 개성지방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고려 시기의 소주는 순수한 곡식으로 만들어서 맛이 좋았으며, 한편으로 그 맛이 순하고 청결하여 이를 이용하는 자가 많았는데, 증류주이기 때문에 값이 비쌌다고 합니다.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釀醞署)에서 다스리는데, 청주(淸酒)와 법주(法酒)의 두 가지가 있어서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해 둔다.’ 『고려도경』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는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거나 걸러내여 맑은 술을 빚었고 이미 덧술법도 사용하여 알코올 농도가 제법 높은 청주를 빚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윤복의 주막도

현대에 유명주로 꼽히는 술들이 조선시대에 정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때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여 제조 원료도 맵쌀 위주에서 찹쌀로 바뀌고 발효 기술도 단(單)담금에서 중양법(重醸法)으로 바뀌면서 양보다 질 좋은 술들이 제조 되었는데, 이때 양주(良酒)로 손꼽히던 주품들은 삼해주, 이화주,부의주, 하향주, 춘주, 국화주 등이었습니다. 특히 증류주는 국제화 단계로 발달하여 대마도를 통하여 일본, 중국 등에 수출이 빈번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자가제조가 허용되어 자유로이 발전되었으나 중국에서는 국가가 제조를 관장함에 따라 우리술의 수출이 용이하여 더욱 발전되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지방주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지방마다 비전(秘傳)되는 술들이 맛과 멋을 내었으며 이때의 명주로는 서울의 약사춘, 여산의 호산춘, 충청의 노산춘, 평안의 벽향주, 김천의 청명주 등이 유명한 술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유입된 외래주로는 천축주(天竺酒), 미인주(美人酒), 황주(황주), 섬라주(暹羅酒), 녹두주(綠豆酒), 무술주(戊戌酒), 계명주(鷄鳴酒), 정향주(程香酒)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집에서 빚은 술인 가양주 문화가 발달되었는데 이는 농사일과 조상 숭배, 손님접대 등을 중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날에는 도소주를 먹었고, 정월대보름에는 귀밝이술을, 삼짇날의 소면주, 두견주, 과하주 등과 단오의 창포주를 먹었습니다. 청명, 한식이 돌아오면 찹쌀로 빚은 청명주를 성묘 때의 제주로 사용했고 더워지기 시작하는 유두날 절기주로 동동주와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추석에는 맨 먼저 수확한 햅쌀로 차례상에 올릴 술 그리고 떡을 빚는데 햅쌀로 빚은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신도주 또는 햅쌀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우리 술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1909년 주세법이 제정되면서 전통주는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세령(酒稅令)이 나왔고 생산량의 최저한도를 정해서 소규모 양조장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집이나 주막에서 소량 만들던 소규모 주조업자는 강제로 정리되고 대형 양조장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주세령이 시행되면서 30만 명이 넘던 자가용 주조 면허는 급격히 줄어 1931년이 되면 1명만이 남게 됩니다. 이때 전국의 주류제조장수도 4670개로 정리되면서 대형 양조장 위주로 완전히 제편이 됩니다. 결국 1934년 주세령 개정을 통해 자가용주 면허는 완전히 폐지됩니다. 해방이 된 후에도 당시의 주세법을 그래도 이어받아 근대의 주세법에서도 자가양조를 금지했기에 밀주(密酒)가 아니면 집에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광복을 맞았지만 정부는 일본의 주세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식량난으로 전통주의 맥이 끊기게 되었고 현대에는 전통주 복원이라는 숙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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