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보다 더한 고통 경신대기근

2023. 6. 23. 19:0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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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대기근입니다.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으며,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조선 8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당시 조선 인구의 1200~1400만 명중 약 최소 15만에서 최대 85만 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조선현종실록』
조선에게 들이닥친 유례없는 대기근, 경신대기근이 덮친 1670년과 1671년 당시는 17세기로 이른바 ‘소빙하기’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하락했던 시기로 이에 대해선 태양의 흑점활동이 쇠퇴 또는 중지 상태에 돌입하면서 지구에 닿는 발열량이 감소해 소빙기가 도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전세게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농산물 생산량이 줄어들고 알프스의 빙하가 늘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강과 운하가 얼어붙었습니다. 중국에선 강남의 감귤 농장이 추위로 전멸했으며, 일본은 북부 지역에서 소빙기 기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경신대기근을 겪었으며 이 시기에 수많은 자연재해가 조선을 덮쳤습니다.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현종 18권, 11년(1670, 경술년) 1월 1일
‘평안도 이산군(理山郡)에 작년 11월 29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며, 희천군(熙川郡)에서도 같은 날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는데 흰 무지개 세 가닥이 가로로 얽혔으나, 해를 꿰뚫지는 않았다.’  -현종 18권, 11년(1670, 경술년) 1월 3일-
  앞으로 다가올 변고에 조선 조정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현종실록』
 유성과 함께 운석이 떨어졌으며 이로 인해 먼지들이 발생해 햇무리, 달무리는 물론이고 하늘이 자주 어두컴컴해졌으며 이로 인해 해가 보이지 않아 기온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평안도 평양에 지진이 있었다.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에서 멈추었는데 소리가 천둥치듯 하여 가옥이 모두 흔들렸다. 순안(順安)·영유(永柔)·중화(中和)·숙천(肅川)·강서(江西)·은산(殷山) 등지에도 같은 날 지진이 있었다.’ -현개(현종개수실록) 21권, 10년(1669, 기유) 8월 14일-
이어 지진도 일어났으며 이러한 자연재해는 현종 재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신년에 지진은 더욱 집중되었습니다. 

‘전염병이 도내를 돌아 513명이 통증을 호소하고, 사망자가 30명에 이르렀으며, 전라도에서도 598명이 감염되었고, 43명의 사망자가 속출했다’  1670년 1월 4일 충청 감사의 보고
1670년 윤 2월 26일, 봄을 앞둔 이 시점 서울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정오에는 팥 크기만한 우박이 떨어졌으며 이틀 뒤에는 경상도에도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3월엔 비가 오지 않아 우물과 냇가 모두 말라버려 파종은 힘들게 되었고 4월, 비는 내리지 않고 우박만 떨어지는데다 밤만 되면 서리까지 겹치니 그 해 농사는 사실상 망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5월에도 가뭄이 이어졌고 우박도 심해졌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고 동물들도 죽어나갔습니다. 5월 23일 이미 농사가 망친 이후에 내린 비는 가뭄을 해소하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폭우처럼 쏟아져 19명이 익사‧압사하고 논과 밭이 물에 잠겼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전염병까지 겹쳤습니다. 이 전염병으로 전국에서 1400여 명 이상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메뚜기 떼는 그나마 남은 곡식들마저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고통이 끝없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 -1670년 8월 21일 어전회의에서 영의정 허적-

6월에도 우박이 쏟아졌으며 중순에는 전국에 폭우가 쏟아져 물난리가 났습니다. 태풍은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으며 7월에는 눈이 내리기까지 합니다. 추수를 앞둔 작물이 죄다 말라죽었고 함경도 쪽이 특히 피해가 심했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올 때 날이 개기를 바라는 의미의 제사인 영제를 지내기도 했으나 폭우와 강풍이 한반도 남부를 덮쳤고 제주도의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해일로 인해 짠 바닷물이 산과 들로 밀려들어왔고, 작물들은 소금물에 절어 말라죽었으며 파도로 인해 생겨난 안개에서는 소금 맛이 날 정도였습니다. 제주도에서 굶지 않는 사람이 없는 정도가 되자 육지에 곡물지원을 요청했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소도 전염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조선에서는 농본국가로 소를 중요하게 여겨 도축도 금하던 시기였는데 소도 한 해 농사도 망한 마당에 소가 죽는다는 것은 농업을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황해도에서 7월 한 달 만에 역병으로 죽은 소가 897마리, 경기도에선 137마리였고 사람들도 전염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8월에는 차가운 비인 냉우까지 내리니 이러한 기현상은 1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1년 내내 자연재해로 시달린 조선의 고을 중 전국 360개 고을이 대흉작을 맞았습니다. 보통 기근을 맞으며 살아남은 지역의 작물을 흉작을 맞은 고을에게 곡물을 보내어 그 고통을 나누려했지만 이때에는 이마저도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1670년에는 첫 아사자가 보고되었고 8월에는 급속하게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기근이 심해지자 식량이 급해지니 소도축금지령도 해제하기에 이릅니다. 
1671년 1월, 서울에 진휼소가 열렸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보여 전염병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전염병은 양반, 양민, 백정, 노비을 거르지 않았고 급기야는 궁궐을 지키는 군인 중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하니 이는 조선 왕실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진휼소의 움막에서는 죽어가는 사람들로 채워졌고 왕실 종친들 중에도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를 피해 서울을 떠나는 사람이 생겼으며 지방관청은 텅 비어 사실상 조선의 콘트롤 타워는 마비상태에 이릅니다. 일례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보통 같으면 1~2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으나 기근과 역병으로 역참이 텅 비고 파발이 부족해 가는데 5~7일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보고가 늦어지는 변방 지역은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없어 더욱 피해를 키우는 악순환이 되었습니다. 하급관리들은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서울탈출을 원하는 중상급 관리들은 핑계를 대며 임금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릅니다. 워낙 많은 사상자에 조선의 하급관원들도 이를 처리하는 데에 애를 먹었습니다. 조선은 결국 승려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시신을 수습하였고 효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한성 바깥에 합동매장하는 것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1670년과 1671년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5만 2천명이었으며,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2만 3천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사망자 비율은 전라도가 가장 높았으며(1만 2500명, 54%), 경상도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4천 명, 17%). 상황이 이렇다 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패륜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버리고, 부모가 어린 자식을 버리며, 가장은 가족을 버리고, 아내는 남편을 버리는 일이 발생했으며 급기야는 인육을 먹는 식인도 일어난 것입니다. 충청도 깊은 산골에서는 한 여인이 자신의 3살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비판받을 일이었지만 상황이 이런 지라 시큰둥했고 오히려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대재해로 인해 비교적 진휼이 잘 이루어진 서울로 사람들이 향했고 인구 수 2위였던 평안도는 4위가 되고 전라도가 2위로 급부상합니다. 다수의 유민들은 비교적 미개척지였던 북방과 만주로 많이 향했으며 조선정부는 진휼정책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포 면제, 토지세 감면, 부채 탕감 등 경제적 지원책도 논의되었고 대동법의 지지여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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