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막은 어땠을까.
2023. 6. 27. 17:2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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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보다보면 많이 등장하는 배경 중의 하나가 바로 주막입니다. 마치 서민들이 자유롭게 들려서 음식을 먹고 잠도 청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데요. 이러한 주막은 나그네가 머물 수 있도록 술과 밥을 파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으며 주사(酒肆)·주가(酒家)·주포(酒舖)라고도 불렸으며,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술집과 식당과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막에 대한 기원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기록상으로 주막의 효시는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천관(天官)의 술집으로 보기도 하며 이는 김유신(金庾信)이 젊었을 때 천관이 술 파는 집에 다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술과 음식, 그리고 숙박을 제공하는 상업 형태로써의 주막은 조선 중기부터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주막(酒幕)은 한자 뜻대로 풀어보면 술을 파는 곳으로 숙박도 취급하는 곳이긴 했지만 단어의 의미에서 그렇듯 숙박비는 따로 받지 않고 음식과 술값만 받았으므로 수준급의 숙박시설은 기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던 것은 바로 주막이 가지고 있는 성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주막은 ‘酒幕’이므로 이는 주점(酒店)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단어의 의미로만 본다면 주막은 천막으로 덮은 임시건물인 셈입니다. 또한 주막의 시작이 ‘간단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임시 공간’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는 합법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처음 그렇게 시작된 주막은 변화를 거듭하여 건물 형태에서 잠도 자고, 술과 밥을 내놓는 공간으로 변해갔으니 우리가 아는 주막은 불과 100여 년 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조선 초중기,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주로 조정의 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각 지역 도로에 촘촘히 역과 원을 만들고, 공식적인 이동 시에는 반드시 역원을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상업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 초중기 사회에 이동이 먼 사람은 정부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고 이 외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은 아는 집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보러 먼 길을 가는 사람, 즉 수험생에게 전국 곳곳에 자신들이 머물만한 지인의 집이 존재할리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동문수학한 이들로 묶여있기에 혈연, 지연으로 얽힌 이들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했으며 동리에서 가장 번듯한 반가나 더러는 깊은 산속 외딴집에서 묵기도 합니다.
‘역’은 잠을 자지 않는 곳입니다. 전해야 할 문서를 챙기거나 물을 마시고,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은 숙박, 식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국가의 공식 시설입니다. 여기서 말에게 사료를 주고 잠을 재웠준 것입니다. 한때는 전국에 1천여 개의 원이 있었습니다. 원은 30리마다 하나씩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오늘날도 남아 있는 ‘조치원’ ‘이태원’ ‘사리원’ ‘인덕원’ 등이 모두 조선 시대 역원제도의 ‘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은 퇴계원, 혜음원, 인덕원, 다락원 등의 ‘원’은 좀 더 올라가면 고려시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원’은 절에서 관리하던 숙박업소로, 때로는 행려병자의 치료와 빈민구제사업도 겸했던 다양한 목적의 시설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불교 탄압 등으로 절에서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민간인들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결국 땔나무나 마실 물 밖에 제공하지 못하는 영락한 시설이 되었습니다. 17세기에 박두세朴斗世가 서울에 과거 보러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남 아산의 요로원要路院이라는 곳에서 묵게 된 과객의 이야기로 소설을 썼는데, 주인공은 침구는 물론 반찬으로 장과 소금에 절여 말린 청어도 갖고 다녀야 했고, 심지어 주막에 도착해서는 쌀을 꺼내 밥도 지었습니다. 방안에서 불을 밝히기 위한 관솔도 갖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후기에는 주막이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숙종 조 이후 잉여농산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잉여생산물은 민간의 ‘탈법적인’ 상업행위로 이어지며 움직이는 사람, 상인들이 생겼고 이들이 이용한 주막 중에 탈법적인 공간도 있었습니다.
“경기감사(京畿監司) 이정제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중략) 지금의 이른바 주막[今之所謂酒幕]은 곧 옛날의 관정[卽古之關亭也]으로서, 적도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賊徒夜宿酒幕]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형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략)” -‘조선왕조실록’ 영조 4년(1728년) 4월 2일-
당시 기록을 보면 주막에서 잠을 잔다고 표현했으니 적어도 이 시기에 주막이 잠자는 공간으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나 보편적인 시설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전략) (유희춘이) 또 진술하기를, “근래에 도둑이 점점 불어나 경기도의 탄막(炭幕)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하여 그 집을 불태웠다고 하고, 서울 안에도 저녁이나 밤사이에 노략질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후략)” - 『미암집』, 유희춘-
탄막은 숯이나 건초, 나무 등을 보관하는 곳인데요. 16세기에 이미 탄막은 주막이 되었습니다. 다만 주모, 평상, 국밥은 없어도 잠자는 곳입니다. 이러한 주막이나 탄막이 헷갈리게 나타나지만 이후 역원의 자리는 주막과 그 변형형태가 대신하게 되었고 그렇게 된 배경에는 부패와 재정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즈음 교통 요충지에 생겨난 주막에서 여행자를 맞이합니다. 당시 해가 기울면 어두워져서 길을 갈 수도 없지만 야행성인 호랑이가 덮칠 우려도 있었습니다. 이 때에는 현대의 여관이나 모텔과 달리 주막은 잠자리와 식사, 말먹이만을 해결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주막은 오직 흙바닥에 자리를 깔아 놓고 목침만을 갖추어 놓았으며 그것도 대개는 여러 명이 한 방에서 뒤엉켜 자야 했습니다다. 침구도 스스로 마련하여야 했으므로 여행객의 짐보따리에는 온갖 옷가지, 세면용구, 비상식량에 요와 이불까지 있었습니다. 다만 방안의 바닥은 뜨겁게 해주었는데 호랑이의 위협 때문에 방문도 열지 못하는 방안에서 방구석에서 메주 띄우는 냄새까지 뒤섞인 40도에 가까운 열기에 잠을 설쳤으며, 몇 해 뒤에 입국한 스웨덴의 기자 아손 그렙스트A:SON Grebst는 조선인들은 아침이면 방에서 빵처럼 구워져 나온다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막이 항상 잠자리를 제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식사만 제공하는 곳도 꽤 있었으며 술을 사면 안주값을 따로 받지 않고 딸려 나왔습니다.
1900년대 초 서양인 제이콥 로버트 무스는 바라본 주막을 보면 두 평 방안에 20명의 장정이 들어가야 했으며 방을 사용하는 데에는 일체 돈을 받지 않고, 오로지 음식 값만 받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합니다. 방에는 베개로 쓰이는 목침 말고는 이불은 물론 어떠한 가구도 없었고 제일 좋다고 소문난 주막에 가도 볏지 돗자리가 깔린 따뜻한 방바닥만이 전부였으며 뜨거운 방바닥 때문에 벌레들이 득실거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막에서 나오는 음식은 세 끼가 똑같았으며 아무런 양념도 없는 많은 밥을 나물, 야채들과 먹어야 했습니다. 모든 식사를 마치면 뜨거운 누룽지 물이 나왔습니다. 또한, 고추장과 무절임 그리고 배추 김치가 대표적인 반찬이었다고 합니다. 주막의 밥값은 미국 돈으로 대략 10센트(현재 가치로 따지면 2,700원)이었으며 이 값에는 저녁, 아침식사 그리고 숙박료까지 포함된 가격입니다. 조선에서 일반 노동자가 하루종일 벌어서 얻는 돈이 10센트였다고 하니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조선 주막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은행식 거래가 가능했는데요. 여행자는 처음 엽전 꾸러미를 맡긴 A주막에서 금액을 적은 영수증을 받습니다. 이후 B주막에서 영수증을 보여준 후 먹은 음식과 술, 숙박비 내역 등을 그 영수증에게 기입했다. 이후 들른 다른 주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른 주막에서 정산 후 남은 돈을 돌려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무거운 엽전을 전부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편히 여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통주막은 일제강점기 들어 서서히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거나 기차역 등 새로운 교통요지가 생기면서 기존 주막의 쇠퇴는 막을 수 없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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