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독립의 역사를 품은 태극기

2023. 6. 14. 18:1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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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마다 상징하는 것이 있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국기입니다. 스포츠 행사에 그 국가의 소속임을 밝히기 위해 해당 국가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임하기도 합니다. 태극기는 근대국가의 필수 아이템이지만 조선에서는 처음에 국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1875년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바로 운요호사건입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입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합니다.
‘운요호에 국기를 달아서 일본의 배라는 것을 표시했는데 어째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까.’
그리고 이번 사건의 책임은 조선에게 있다며 배상금까지 요구합니다.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 개항 조약을 맺을 때 일본에서는 국기를 내걸었으나 조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일본 사절이 조선의 국기는 무엇이냐고 묻자 오경석吳慶錫이 임기응변으로 강화 연무당 여기저기에 그려진 태극을 가리키며 '저것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태극은 건축물이나 생활 도구 등에 많이 그려져 있어 그 말이 억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 태극기의 기원에 대해 이거다라고 명확히 말하기는 힘듭니다. 오경석이 역학에 밝은 김경수와 상의하여 태극 주위에 4괘를 배치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이는 하나의 설입니다. 가장 유력한 이야기이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종이 외교고문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그러다가 태극기에 대해 조선정부에서 진지하게 논의하게 된 것은 황쭌센의 『조선책략』이 들어오고나서부터였습니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며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까지 제시했는데 고종이 황준헌의 의견을 묵살하고 임금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백성을 뜻하는 흰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습니다. 이에 청나라의 마건충이 일본국기 닮았다고 비난하자 “바탕을 흰색으로 하고 붉은 용 그림으로 나타내되 발톱을 네 개로 해 중국기의 다섯 용 발톱과 구분하자”고 제안하였고 이에 김홍집은 “그리기 번잡하니 반홍반청의 태극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될 것”이라 하여 4개월 뒤인 1883년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되었습니다. 그 날이 바로 1883년 3월 6일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태극기가 사용된 적은 있었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사용한 국기가 이응준이 고안한 국기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1882년 5월 전권대신 신헌과 김홍집 일행이 제물포에 정박한 스와타라호를 방문했을 때 미국전권대사 슈펠트 제독은 조선이 독립국으로 인정받으려면 국기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김홍집의 지시를 맡은 통역관 이응준이 태극과 4괘를 이용한 국기를 만들었고 이를 조약 체결 전에 청나라 사신 마젠창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젠창은 청나라의 뜻대로 용기를 사용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조약현장에 나부낀 것은 이응준의 태극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정식국기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정부의 논의를 거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김홍집은 정부에 붉은 색 바탕에 반청반백의 태극기를 제안하였고 마젠창은 흰 바탕에 반홍, 반흑의 태극을 넣고 조선팔도를 상징한다는 8괘를 그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냅니다. 이후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게 되고 이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박영효가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는 배에 탔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그는 고종으로부터 국기 제작을 위임받았고 그렇게 준비한 것이 태극팔괘도였습니다. 이를 본 선장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태극과 팔괘의 형식은 특별해서 눈에 띌만큼 뛰어나지만 팔괘의 분포가 자못 조잡하여 분명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며 또 각국이 이를 모방하여 만드는 데에 매우 불편하니, 다만 사괘만사용하여 네 모서리만 긋는다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박영효는 이를 받아들여 반홍반청의 태극에 건곤감리 4괘를 넣은 태극기를 완성하였습니다. 이후 이 태극기가 조정에 보고되었고 1883년 3월 6일에 태극기가 정식으로 제정되었습니다. 
한편 태극기 제작설에 한 인물이 더 추가되기도 했는데 그는 월남 이상재선생입니다.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 문신으로 일본시찰단(1881) 수행원, 주미공사 서기관, 학무아문 참의,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지낸 엘리트 정치인입니다. 민족운동에 큰 공헌을 한 이상재는 주역과 태극도설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박영효가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리던 1882년 그는 22세였고 이상재는 그보다 11살 위인 33살이었습니다. 이상재는 1881년 1월(박영효가 사절단으로 방일하기 1년 전), 박정양을 단장으로 구성된 일본시찰단(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될 때 박정양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동행하였습니다. 당시 박정양은 국가를 대표해 방일하는 일본시찰단이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갖고 일본에 입국해야겠다는 생각에 비서인 이상재에게 깃발을 고안하라고 지시했고, 이상재는 선상에서 태극기의 초안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나 문헌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태극기가 어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닌 당대 지성인들의 노력과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확보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합쳐져 만들어낸 산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이상재 선생이 태극기 제작에 관여했을 수 있으나 전적으로 누구 하나의 생각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현재 가장 오래된 태극기는  ‘데니 태극기’(등록문화재 382호)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언 데니(1838~1900)는 1886년 청나라 북양대신(총리) 리훙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외교 고문이 됐지만, 자주외교를 원하는 고종의 뜻을 존중했습니다.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비판하고,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과 협조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데니는 이 때문에 청나라의 미움을 받아 파면당했고, 1890년 고종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데니에게 태극기를 하사했습니다. 이후 1981년 데니의 후손인 윌리엄 랠스턴이 이 태극기를 우리 정부에 기증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12인의 애국지사가 혈서로 남긴 태극기

태극기를 조선정부가 사용한 이후 백성들에게 알려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898년 10월 29일에 종로에서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개막연설을 한 것은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전해져오는 당시 그림에서는 박성춘의 뒤를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태극기는 국왕의 통치권을 드러내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방편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선포 및 광무황제 즉위식 그리고 고종황제 즉위식에서도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1890년대 후반에는 관급 어학교와 소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서 태극기가 사용되었고 국권이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들은 태극기를 품고 싸웠고 1909년 안중근이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단지회를 결성하고 왼손의 약지를 끊어 붉은 피로 ‘대한독립’이란 글자를 쓰며 의지를 다지니 그 글자가 새겨진 곳은 태극기였습니다. 하지만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망하자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상징이 돼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인 만세시위에 사용됐습니다. 일제는 태극기의 제조와 소지를 금지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선언과 함께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습니다. 1948년 7월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국기로 태극기를 채택했습니다. 음과 양을 뜻하는 태극과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흰색바탕, 각각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는 건곤감리가 조화를 이루어 우리에게 친숙한 태극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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