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도 전화를 걸었다.

2023. 7. 1. 17:3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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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모습 고종이 사용한 전화기와 같은 모델의 L.M에릭손이 생산한 자석식 벽걸이 전화기.

한국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으로 청나라에 기술을 배우러갔던 유학생 ‘상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역사적 변곡점에 있었습니다. 잇따라 일어나는 임오군란, 갑오개혁, 을미사변 같은 정국을 불안케 하는 사건들은 전화사업 추진에 차질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1896년 10월에 덕수궁 내부에 전화기가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궁에서 직접 인천으로 통화를 합니다. 한국 최초로 이뤄진 이 전화 통화로 인천 감옥에 수감 중이던 김창수라는 인물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김창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집행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여러 날이 걸리는 어명 전달 방식이 아닌 직접 ‘전화’를 걸어 사형 집행 정지 명령을 내리는 파격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고종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김창수는 이후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고종이 건 한국 최초의 전화로 사형을 면했던 인물이 바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백범은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 받았던 사실을 백범일지에 기록한 것인데요. 그런데 이 때 김구가 수감된 감리서로 전달된 결정은 전화가 아니라 전보로 통보된 것이며 고종이 직접 연락한 것이 아니라 법부에서 고종의 재가를 명분으로 사형의 중지가 아닌 판결을 중지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첫 전화 내용에 대한 다른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요. 1898년 1월 24일 인천 개항장 관리가 한성에 전화로 보고한 내용이 그것입니다.
 '조광희가 덕률풍(德律風·텔레폰)으로 아룀. 영국·러시아·미국 군함 7척이 닻을 내렸는데, 영국 병사들이 상륙했다가 오전 10시 배로 돌아감.' 
이 '외아문일기' 기록을 근거로 흔히 조선에서 전화가 개통된 때를 1898년 1월로 보기도 합니다.
당시 전화기는 궁에서 시작되었는데 임금의 침소 등 궁궐 내부에 3대, 정부의 각 부처에 7대, 평양과 인천에 2대 등 모두 12대였습니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전어기가 있어 시시각각 소식을 신속하게 전할 수 있다.’고 기록합니다. 고종은 신문물인 전화를 무척 애용했습니다. 혼란한 정국에서 다른 사람을 믿는 게 쉽지 않아 전화로 직접 칙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고종이 건 전화에 벨이 울리면, 신하들이 세 번 절한 후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고종은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전화를 드려 조석 문안을 드리기도 했습니다.이른바 전화문상인데요.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도 똑같이 행하였다고 합니다. 

1902년 3월 20일, 서울과 인천 사이를 잇는 전화가 개통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공중전화였습니다. 당시 전화기는 ‘덕률풍’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전화기의 영어식 이름인 ‘텔레폰’과 비슷한 한자음을 가져다 붙인 것입니다. ‘덕률풍’ 이외에도 비슷한 발음인 ‘다리풍’, 혹은 말을 전하는 기계라는 뜻의 ‘전어기’, ‘어화통’ 등으로 불렸습니다. 민간전화는 처음엔 전화소에서 교환을 통해서만 통화가 가능했습니다. 교환시설을 갖춘 관소인 전화소는 1902년 한성(서울)전화소와 인천전화소에서 시작해 개성전화소의 개설로 이어졌으며 이듬해에는 평양과 수원, 한성전화소 산하인 서울 경교, 도동, 마포, 시흥 등 9개소로 늘었습니다. 전화소 개설이 증가함에 따라 개인전화 가입자 수도 80여 명으로 급격히 늘었습니다. 통화가능시간은 오전 7시에서 오후 10시, 통화료는 5분에 50전.  다음 대기자가 있으면 통화는 10분을 넘길 수 없었습니다. 통화 중 말다툼을 하거나 저속한 언어·욕설을 하면 교환원이 통화를 중단시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화를 주로 이용했던 주한 외국인들이 사생활 침해라고 들고 일어나 전화소 관리를 전화기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1902년 서울의 민간인 전화 가입자는 총 24명에 한국인은 2명, 1905년엔 총 가입자 50명 가운데 한국인은 10명에 불과했다니 외국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한국전기통신 100년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 가입자를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인천 지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천전화소가 교환 업무를 개시한 때가 1903년 2월 17일로, 이 날이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지점 사이에 전화가 개통된 날인 동시에 한국 최초의 전화 가입이 이루어진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2년 6월부터는 가정에서 전화를 개설해 쓸 수 있었습니다. 한성에서 최초 가입자 2명으로 시작해 인천·수원 등 도시 중심으로 보급을 늘려갔습니다만 가입자는 대부분 외국인이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럼 당 전화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00년대 초중반에는 다이얼이 없는 교환식 전화기였습니다.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통신시설을 먼저 장악했고, 결국 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1905년 일본이 통신권을 빼앗아감으로써 우리나라 통신역사는 암흑기를 맞습니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을 통해 통신주권을 빼앗아간 일본은 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 시켰으며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우리 민족은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고 일제 강제 병합이후에는 전국적으로 3.1 운동을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우리민족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전국에 있는 헌병대, 경찰서에 전화를 설치합니다. 이른바 경비 전화였습니다. 그 전화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촘촘히 퍼져나갔고, 감시는 더욱 더 강화됐습니다. 한편 경비전화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지만 기업, 상점을 중심으로 전화가 설치되었고 전화사용이 늘어났습니다. 한편 일제는 1924년 서울과 중국 봉천 간 국제전화를 개통하는 등 통신산업을 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1908년에 공전식 방식, 1935년에 자동식 방식이 도입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점진적인 발전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전화가입자 대부분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41년 한국인 가입자는 30%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한국의 현실은 이처럼 전화가입자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전화기들은 대부분 일본 행정용과 일부 특권층 사치품 용도에 국한된  것입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1892년 뉴욕과 시카고간 전화 연결을 시험하는 모습

당시 잡지 <별건곤>(1927년 3월 1일치 발행)의 ‘극장만담’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보면, ‘극장에 온 손님에게 전화가 올 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리를 버럭 질러서... 여기에는 완전치는 못하나마 스크린 옆 기둥에 유리등을 끼워놓고 그 유리에 (전화 온) 사람의 이름을 써 전등으로 신호하는 방식으로...’라고 썼습니다. 1925년 잡지 『별건곤』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바로 최초의 폰팅입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은 채 3년간 전화로 사랑을 나누던 남녀가 우연히 만나게 되지만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945년 광복이 이루어졌습니다. 광복 당시 전화 가입자는 4만50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1960년대 9만5000여 명까지 증가했지만 대부분 수동식 전화가입자여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6·25전쟁은 통신시설의 80%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폐허가 된 통신망은 휴전 후 미국의 원조로 본격적으로 복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7년이 되어서야 겨우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 흑통, 교환원이 없는 자동식으로 부유층이 사용한 백통이 있었는데 1970년대 백통은 서민들의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흔히 ‘전화를 건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초기 전화 사용법에서 온 말입니다. 과거에는 전화 통화를 하려면 교환수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때 수화기를 고리에 걸고 손잡이를 돌리면 교환수와 연결됐는데, 이에 ‘전화를 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때 사용하던 표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1997년에는 전화가입자가 최초로 2000만명을 돌파했으며 현재는 휴대폰의 보급으로 인해 1인 1전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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