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등을 밝히다

2023. 7. 5. 21:2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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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3월 6일 경복궁 건청궁의 점등식을 시현한 시등화

4월 10일은 전기의 날입니다. 서양의 앞선 과학문물을 통해 국운 회복을 꿈꾸던 고종은 한성전기를 설립해, 1900년 4월 10일 종로 사거리 주변 가로등에 전깃불을 밝혔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점등이었습니다.
‘1900년 4월 10일 민간 최초로 종로 사거리에 3개의 가로등이 점등돼 전차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혔다’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그런데 사실 이날은 민간 최초로 점등이 밝혀진 날이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날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기 역사의 첫 시작은 이보다 13년 빠른 1887년 3월 6일입니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1879년으로부터 불과 8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보다 2년 앞선 시기였고, 시설 역시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동시에 켤 수 있는 동양 최고의 시설이었습니다. 경복궁 건청궁에는 전기발상지 표지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서 가장 먼저 전등이 들어온 자리입니다. 고종과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백열구 전구들이 밝혔고 당시로서는 전에 보지 못했던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근대문물이 처음 들어오는 곳은 궁궐이었습니다. 최첨단 근대문물은 설치비와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전등이 처음 밝힌 곳이 궁궐이라는 것은 아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1894년 5월에는 경복궁 내 병기창에 제2전등소를 준공했고, 창덕궁에도 처음으로 점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인은 전등 덕분에 원활한 야간 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음 궁궐에 전기가 들어왔을 때 이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신기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재미있게 들릴 수 있는 이름을 전등에 붙여주었는데요. 당시 발전기에서 전력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전등이 깜빡였는데 이를 보고 '도깨비불'로 부르기도 했고, 전등 설치에 많은 비용이 들었고 정전이 잦아 건달 같다고 해서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편 기계작동으로 연못물이 뜨거워져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할 때는 증어망국(蒸魚亡國)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하였습니다. 초창기 건청궁 옥호루 앞마당에 설치된 가로등. 당시 발전규모는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설비였다.

초창기 건청궁 옥호루 앞마당에 설치된 가로등. 당시 발전규모는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설비였다.

전기가 처음 들어온 건청궁은 지금의 향원지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사이에 위치했던 ‘궁궐 내 궁궐’이었습니다. 고종께서 대원군 섭정을 벗어난 1873년 지어졌고, 1885년경부터 아관파천으로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1896년까지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895년에는 을미사변이 있었고 그 밖에도 조선을 혼란케하는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임금은 임오군란 및 갑신정변 이래 가까이서 병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피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가마꾼 20명을 배불리 먹여 궁성 북문에 대기시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또 밤을 이용해 소요가 많이 발생하므로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했다.’ -황현, 『매천야록』
이 글을 보면 황현은 밤에 일어날 변란을 두려워하여 전등을 밝힌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등을 밝힌 건 근대화에 대한 고종의 의지입니다. 1883년 미국에 선진문물을 배우러 간 '보빙사절단'의 유길준은 뉴욕의 에디슨 전기회사를 보고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서구 문명에 감탄한 유길준은 우리도 전깃불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유길준은 뉴욕에 가서 발전기에서 전기가 나오는 과정을 보고 ‘마귀불’이라 감탄한 것입니다. 여기에 에디슨도 조선에서의 전등 사업이 아시아 시장으로 사업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여겨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도 크게 한몫했습니다.

보빙사의 일원이던 유길준(오른쪽)은 미국의 각 도시에 켜진 전등불(왼쪽)을 보고 ‘악마의 힘으로 켜진 불’이라고 경악했다.

 보빙사 일행은 뉴욕에 머물면서 전등설비 도입을 상담하였고 에디슨 전등회사에서는 아시아 무역에 종사하고 잇던 프레이저를 뉴욕 주재 조선 명예총영사로 내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에디슨은 프레이저를 조선에서 전기와 전화사업을 추진할 대리인으로 지정했습니다. 보빙사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에디슨 전등 회사에 전등 설비를 주문받은 미국 공사 푸트는 조선 조정의 허락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884년 9월 4일 에디슨 전등회사에 전등 플랜트를 발주했습니다. 전기등소 설립에 관한 것은 조선과 미국정부차원에서 추진되었습니다. 그리고 10월에는 1만 5500만 달러에 전등 플랜트를 구매하기로 합의했으며 갑신정변이 지나기길 기다렸다가 1886년 9월 전기기사 맥케이와 보조 기사 2명을 선발하여 조선에 파견하여 1886년 11월 초순에 경복궁 안에 전기등소를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전기를 처음 들여오고 나서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에디슨전등회사에서 파견된 전등기사(전등교사) 맥케이(Willliam W. McKay, 麥巨, 1864~1877)는 미국인 전등기사로서 1886년 11월 입국하여 조선정부와 고빙(雇聘) 계약을 맺고 전기등설비 건설을 감독하고 직접 운영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1887년 3월 8일 조선인 기수(旗手)의 권총오발 사건으로 사망함에 따라 조선정부는 부득이 전등소 운영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약 6개월 간 휴업 끝에 새로운 영국인 전등교사를 초빙하여 재운전에 들어갔지만, 이 또한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원활한 전기공급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1894년 창덕궁에 제2전등소가 준공되었으며, 그 규모는 종전의 건청궁 전등소의 약 3배에 달하는 크기였습니다. 그리하여 창덕궁에도 처음 전등이 점화되었는데 결국 재정문제로 중요한 몇 개 전각(殿閣)에 국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근대화에 대한 고종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한성전기를 설립해 1900년 4월 10일 종로 사거리 전차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 가로등에 전깃불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전기의 날인 것입니다. 

한성전기의 사옥 모습. 조선황실은 미국인 콜브란에게 경영을 위탁했으나 그의 경영비리가 발견돼 경영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난다. 이 때 미국 해병대가 동원돼 한성사옥의 경비를 서며 조선황실을 압박한다.

한성전기는 또 1901년 6월 17일 덕수궁에 전기를 공급한 데 이어 그해 6월말 서울 진고개에 있던 일본인 상가 600 가구에 상업전기를 공급해 서울 한복판의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전기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1898년 1월 26일 서울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를 설립하며 전기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전력의 모태입니다. 이후 120년 넘게 이어진 우리나 전력의 역사는 한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합니다. 한전은 한성전기 설립일을 창립기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성전기는 경영을 위탁받은 콜브란이 황실이 이런 근대식 회사 경영에 어둡다는 것을 이용하여 황실을 속이는 바람에 한성전기의 재무상태가 안좋아졌으며 이에 고종은 75만엔을 더 내고 콜브란과 한미전기를 설립해 분쟁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콜브란은 한미전기의 경영권을 내놓았고 이를 일한가스회사가 1909년 6월에 인수하는 바람에 고종은 투자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을 밝히는 전등의 수는 많아졌습니다. 1901년 8월 17일 진고개와 본정통(명동, 충무로)에 일본인 상가 주택가에 첫 영업용 전등이 밝혀졌습니다.
‘수만의 전등불이 사람 없는 거리(종로)를 비추면 어떤 몽환경 같이 아름답고 찬란’
‘천만촉의 휘황 전등불과 아울러 불야성(不夜城)을 이룬 것을 볼 때 실로 별천지에 들어선 느낌’(≪별건곤(別乾坤)≫ 1929년 9월호)
1920~30년대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저녁 무렵의 진고개와 본정통의 상점가에 화려한 조명을 좇아 배회하거나,  매년 4월이 되면 창경원(창경궁)에 전등이 장식된 밤 벚꽃 풍경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2023년 현재 전등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오히려 인공조명에 의한 빛공해로 인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밤하늘의 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서울시에 매년 1000건이 넘는 빛 공해 관련 민원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는데요. 근대화를 꿈꾸던 것이 고작 150여 년전, 당시 느꼈던 전등에 대한 경외는 이제는 우려로 바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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