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보다 비극의 역사를 품은 경복궁

2023. 6. 9. 19:4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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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왕궁 중 가장 큰 궁궐이었습니다. 조선 왕조 개국 3년인 1395년에 완공된 궁궐은 390여 칸으로 한양의 중심축에 자리하여 그 역사는 조선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로부터 첫 번째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고, 고심 끝에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국보 제223호인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법전으로 각종 즉위식을 거행했던 왕실의 행사장이며 정전의 옆에 위치한 경회루는 1만원권 구화폐 실릴 만큼 대표적인 건축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도읍을 정하는 것에 도움을 준 이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무학대사입니다.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새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러 곳을 다니던 무학대사는 마침내 한강 북쪽 어느 지점에서 ‘여기가 좋겠구나!’ 생각하며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디에선가 소를 끌고 가던 노인(소에 타고 있었다거나 노인이 아니라 동자였다는 식으로 얘기마다 조금씩 달라짐)이 갑자기 “이런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외쳤습니다. 깜짝 놀란 무학대사는 고개를 숙여(그 자리에서 바싹 엎드렸다는 버전도 있음)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노인은 “여기서 10리만 더 가시오”라고만 말한 뒤 훌쩍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갈 왕(往)자에 십리(十里)를 더해 ‘왕십리’라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어떤 설화에서는 아예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팠는데 ‘왕십리’라고 새겨진 돌이 나와 경악했고 그건 신라 말 도선대사가 파놓은 것이더라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이미 왕십리의 지명은 발음이 같은 ‘왕심리(往深里)’였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그저 야사로 전해지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실 무학대사는 풍수에 그리 밝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하니 경복궁이라는 곳에 의미를 더하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 정도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습니다.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는데, 흥선 대원군 중건 당시 규모가 7225칸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복궁은 그리 왕들에게 선호받은 궁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1차 왕자의 난 때에는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이 되었고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하며 한양으로 옮길 때에는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는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명하고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그는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한 후에 창덕궁에 입궐할 정도였습니다. 1411년에는  "태조께서 지으신 경복궁을 비워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려 태종에게 경복궁에 다시 거처하라고 주청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태종은 무인정사를 이야기하며 부끄러운 일을 벌여 가기가 좀그렇다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태종도 경복궁을 법궁이라 여겼고 자신이 경복궁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후대 왕들도 그러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후 세종대부터는 경복궁은 다시 왕이 실제 거처하는 정궁으로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1886년 전기 기사 맥케이 등 2명을 조선에 파견해 한국 최초의 발전소 '전기등소'를 경복궁 북쪽 후원에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타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였습니다. 1553년(명종 8년)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 및 침전 구역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만 것입니다. 이때 조선 왕조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보물과 유산들도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윤원형 등의지지 하에 명종이 독촉한 결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어 이듬해에 매우 신속하게 중건이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다시 한 번 위기를 겪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수정실록』
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은 방치되었으며 경복궁 중건은 후대 왕들에게 숙제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열악한 재정과 터가 길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경복궁 중건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발행된 원납전과 당백전은 조선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 일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구한말은 조선에게 시련의 역사였고 그 무대는 종종 경복궁이 되었습니다. 임오군란 때에도 경복궁을 기습점령하고는 대원군을 정계에 복귀시켰고 1894년 7월, 청일전쟁을 앞두고 일본군이 기습점령한 곳이 바로 경복궁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경복궁 전투", "경복궁 쿠데타"나 "경복궁의 변"이라고 불분명하게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경복궁이란 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내의 옥호루는 명성왕후가 일본자객의 칼에 맞아 마지막을 맞은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경복궁의 건청궁은 당시 조성정부의 근대화의 의지를 보여준 곳입니다. 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다음 해인 1883년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는데 이 곳에서 ‘마귀불’이라 불리는 전등을 보게 됩니다. 유길준 등은 전등의 도입을 주장했으며 에디슨이 1886년 전기 기사 맥케이 등 2명을 조선에 파견해 한국 최초의 발전소 '전기등소'를 경복궁 북쪽 후원에 설치하였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고종이 밤에 병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새벽까지 궁궐을 훤하게 밝히려 한 점과 개화 노력이 결합된 결과였고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한 지 불과 8년 만의 일이자 중국 자금성이나 일본의 궁성보다 약 2년 앞선 서구 문명 도입이었습니다. 

일제가 우리 조선의 정신적 상징인 경복궁 일대를 훼손하기 위한 명분과 목적으로 1915년 9월부터 약 두 달간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모습


하지만 이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는 우리 조선의 정신적 상징인 경복궁 일대를 훼손하기 위한 명분과 목적으로 1915년 9월부터 약 두 달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개최합니다. 경복궁 경회루 옆에 공진회 선전탑들이 세워졌고 많은 건물이 지어졌으며 이곳에 있던 전각 등 궁궐 건물들을 전부 부수고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는 ‘함께 나아간다’는 뜻의 ‘공진(共進)’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5년간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과 일제가 같이 발전한다는 식의 명분을 사용했으나 이는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기 위한 노림수였던 것입니다. 당시 공사로 약 4000개의 건물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근정전, 경회루, 교태전 등 극히 일부만 남고 흥례문을 비롯한 경복궁의 전각 90% 이상이 헐렸습니다.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1926년 8월 동아일보에 헐려 가는 광화문을 한탄한 칼럼이 실렸습니다. 당시 광화문 철거에 반대한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을 잃으면 서울의 중심을 잃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이러한 논란으로 광화문은 철거를 면할 수 있었으나 경복궁에 대한 파괴는 일제 기간 내내 계속되어 현재 이에 대한 복원이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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