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자라 불린 콜레라

2023. 5. 18. 20:2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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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에는 국내에서 15년 만에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콜레라는 조선시대에는 ‘괴질’로 불리운 병으로 원인을 알 수 없이 한 번에 천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구토하고 설사하는 병의 증상으로 인해 평양성 안에서만 사망한 이가 하루 사이에 삼백 명" 『순조실록』, 1821년 8월 4일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콜레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21년 평안감사 김이교가 설사 및 구토를 동반하는 병을 앓았고 10일 동안 1천 여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며 1817~1824년에는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대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병을 괴질로 부른 이유는 알 수 없는 괴이한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1821년 8월 4일에 괴질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토대로 추론해보면 7월 말일부터 평양부 성 안팎에 괴질에 유행하기 시작해서 사망자가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김이교의 보고를 받고 다음 날에 콜레라가 황해도 지역에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같은 달 17일, 서장관 홍언보는 산해관 이남의 해안 주변에 괴질이 유행해서 죽은 사람이 많다는 보고를 했는데, 이를 통해 조선에서는 이 병이 중국을 거쳐 평안도 지역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김이교의 보고 이후 열흘 뒤에 콜레라는 화성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로 확산되었고, 다시 열흘 뒤에 충청도 산골까지 번졌습니다.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곧바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렇게 유행하며 들불처럼 번진 괴질은 한 달 만에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1822년 이 병은 다시 유행해서 제주도까지 퍼지는데, 이때 유행은 전년도에 감염된 보균자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괴질이라 불린 콜레라는 인도에서 발생하였습니다. 1500년대 포르투갈 탐험가의 저서 『인도의 전설』에서 콜레라에 대한 첫 기록이 남아 있으며 원인은 물론 치료하는 방법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1817년 인도 벵골을 점령한 영국군들이 배를 타고 콜카타로 이동하면서 콜레라 균이 함께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병은 전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인도, 미얀마, 타이를 거쳐 1820년 중국의 광동에 침투했고, 이후 영파, 절강, 서북지역에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21년 남경과 산동, 북경을 거쳐 중국 전역에서 창궐한 뒤 산해관을 거쳐 요동 바닷가 지역을 따라 조선의 의주를 통해 황해도와 평안도로 유입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병에 대해 정보가 없던 학자들은 설사, 오한, 명치 밑이 아프고 식은땀이 나며 속이 답답한 증세, 근육의 뒤틀림 등으로 유추하여서 과거에 존재했던 병인 마각온, 갈탑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습기나 쥐를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습온(濕瘟), 서(鼠)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콜레라에 대해 무지한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콜레라는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도 등장하는 병으로, 기본적으로는 이질, 즉 설사병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바꿔 이야기한다면 설사병이라는 것이 하나의 증상이지만 콜레라는 지칭할 수 없는 단어이므로 서구권에서도 이 병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콜레라가 서양에서 유행하였을 당시 영국의 공리주의자 토마스 스미스는 콜레라는 비전염성 질병으로 파악하고  섹스나 음주 등의 비도덕적인 생활, 가난, 정치에 대한 특정한 입장, 가족적 가치의 무지에 대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또 당시 러시아의 경우 정확한 병의 원인을 모르는 채 전염을 막기 위해 지역을 봉쇄하고 격리함으로써 군중의 폭동을 유발했는데요. 콜레라에 대한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지식인의 발언이자 어처구니없는 행정처리였습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여제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어제 함경도에 나갔던 어사의 말을 들은 결과 북관 백성들의 사정이 몹시 불쌍하다. 이태를 거듭 흉년에 시달리고 작년에는 조세 독촉에 곤욕을 겪었는데, 봄이 되자 역병이 저렇게 극성하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편안히 앉아 있을 경황이 없다, 여제를 지내도록 하라 하고, 이어 직접 제문을 지어 내려보냈다.’ 『정조실록』

샤를 루이 바라와 샤이에 롱의 책 '조선기행'에 실린 고양이 부적. 조선 때는 괴질을 막으려고 고양이 부적을 구해다 대문에 붙였다.


‘시내를 걷다 보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이 붙은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는 쥐 귀신을 잡기 위함이다.’ -O. R.  에비슨, 선교사-
조선에서는 역병이 발생하면 위정자들이 반성하고 그 이후 국가 재정을 풀어서 구휼하고,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고 연고 없이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콜레라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정부가 이러한 방법을 취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에게도 재정적으로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병 유행으로 인해 악화된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제사라도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민간에서는 이를 두고 쥐에게 물린 통증과 비슷하다고 해 쥐통이라 부르기도 하고, 몸 안에 쥐신이 들어왔다고도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단순히 집 대문에 고양이 그림만 붙여 놓는 것으로 이를 예방하려 했습니다. 이에 더해 성 밖에 움막을 짓고 환자들을 데려다 놓고 병이 낫든가 죽든가를 기다리고 무당에게 굿을 시키거나 제사를 올리는 게 다였으니 이러한 노력이 통할리 없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 열에 하나둘도 살아남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이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당시 인구가 1000만 명이었다면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땅이 들어온 콜레라는 몇 번의 유행을 거치며  ‘호랑이가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을 가진 ‘호열자(虎列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886년 7월 5일자 한성주보에 그 표현이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19세기 말 조선에 다시 호열자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조선정부는 근대적인 방역을 실시하게 됩니다. “예방법을 행치 않고 편안히 앉아 인민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으면 정부의 책임을 잃는 일”이라고 공언했던 내무대신 유길준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에비슨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서울 일원의 콜레라 퇴치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순검(경찰) 20여 명을 붙이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관리들에 대한 처벌권까지 주었습니다. 
“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막으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음식은 반드시 끓이고, 끓인 음식은 다시 감염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이 문장은 당시 에비슨이 서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방역위원회를 만들고  방역 활동에 나서며 장안에 부친 포고문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분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환자를 치료하였고 그 중에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박성춘은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 역시 에비슨에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박봉출이 박서양이라는 이름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에 내무대신 유길준에게 한 가지 청원을 하게 됩니다. 백정도 다른 이들처럼 갓을 쓰고 길거리를 다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길거리에서 갓을 쓰고 다니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그에게 아들을 맡아달라고 하던 백정 박성춘이었습니다. 
이후 콜레라의 기세는 계속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불과 2년 사이에 3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그전과는 대처가 차이가 있었습니다. ‘검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으며 4년 뒤에는 전염병을 옮기는 파리를 소탕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위생경찰을 두었으며 청결을 문명국으로 가는 필수조건으로 여기며 이발소, 목욕탕, 공중변소가 들어서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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