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활빈당

2023. 4. 28. 07:5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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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의 일이었습니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 무렵, 충청북도 지금의 회인에 살던 정인원은 자기 집 사랑채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종이 한 장을 들고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활빈당(活貧黨) 발령(發令). 이상 발령하는 일은 전일에 전(錢) 5천 냥을 보내라 하였더니, 3백 냥만 보내니 괘씸한 마음을 어디에 다 말하랴 … 명령을 내니 이번에도 따르지 않으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로다.” 
이 글에서는 활빈당이라는 단체가 보낸 협박장으로 이를 받은 정인원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활빈당이라는 조직은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상의 단체가 아니던가요.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는 활빈당은 의로운 도적으로 나옵니다. 
‘우리가 이제는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건드리지 말고, 각 읍의 수령과 방백들이 백성에게서 착취한 재물을 빼앗아 혹 불쌍한 백성을 구제할 것이니, 이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이라 하리라.’ 『홍길동전』
그런데 소설 속의 허구의 단체였던 활빈당이 300여 년 뒤에 현실세계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구한말 실존했던 활빈당은 홍길동전의 활빈당처럼 의로운 도적이 되어, 백성들을 외세로부터 지켜내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홍길동전』의 활빈당과 구한말에 등장한 활빈당이 어느 정도 비슷한 단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홍길동전』의 활빈당이 구한말에 등장한 활빈당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들이 바란 유토피아인데요. 홍길동이 활빈당을 결성한 주요 이유는 신분 차별이었으나 1900년대 초 활빈당은 빈부 격차와 지배층의 수탈에 맞선 조직으로 신분제보다 정치·경제적 불평등과 차별 제거에 집중했습니다. 두 집단 모두 조선왕조 체제를 비판하고 저항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같지만 1900년대 초 활빈당은 율도국으로 건너간 홍길동과 달리 현실의 도피 체제를 부정하고 이를 파괴하려는 데 앞장선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도적떼가 되었어야 했는가. 조선후기의 농민의 삶은 누구나 알다시피 고달팠습니다. 조선 후기 정부는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수탈하여 이를 충당하고 있었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아무래도 돈을 주고 산 벼슬자리인 만큼 이를 메꾸기 위해 부정부패가 만연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권력이 백성들을 보호해줄 것이란 기대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1876년 이후 제국주의세력의 침탈이 가속화됨에 따라 조선정부의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갔습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항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동학 같은 신앙이 일어나 이들을 이끈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그렇다고 농민들의 불만들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실에서 도망친 일부는 산으로 도망가 조선정부에 대항하였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좀도둑으로 살아가기도 했지만 다른 일부는 탐관오리나 부잣집을 목표로 하여 사회벽혁이라는 기치 아래 뭉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 일부가 활빈당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이러한 활빈당이 『고종실록』에 한 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거리와 저자에 함부로 방(榜)을 내걸고는 민가를 파괴하고, 사람을 살해하며 불을 지르고 재물을 빼앗으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부녀자를 겁탈’ 『고종실록』
그럼 활빈당이 정인원에게 보낸 편지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우리는 네 집을 샅샅이 다 아니, 네가 너를 생각하여라. 우리를 해한 자는 멸문지환(滅門之患)이 있을 것이요 일족을 멸할 것이니 깊이 생각하라. … 우리는 세 가지를 잘하는데, 돈 안 주면 집에 불 지르기와 유부녀 겁탈하기와 파묘(破墓)하기를 잘한다.’ 「활빈당 발령」
그러면서 활빈당은 정인원에게 돈 5천냥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럼 당시 언론에서는 활빈당에 기사를 싣고 있었을까.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남도(南道) 활빈당] 홍주(洪州), 연산(連山) 등지에서 온 소식을 접하니, 요즈음 이른바 활빈당(活貧黨)이라 하는 사람들이 말 타고 총을 차고서 부민가(富民家)에 난입(亂入)해 돈이나 곡식을 마음대로 빼앗아 빈민에게 나눠주는데 그 무리가 수천 명이라더라.’ 「황성신문」 1900년 3월 20일자
또한 이러한 활빈당의 1902년에 작성된 「활빈당발영」이라는 분서에도 등장합니다. 
‘옛날 고래지풍으로 길동 선생 이후로 이칠성, 그후로는 맹감역이니, 편답 팔도뿐 아니라 열국에도 편답하고, 이제 궁궁에 거하노라, 우리도 막비군운이요, 천하를 얻은 후에는 이 허물을 면할사…’


이렇게 보면 활빈당은 홍길동은 선생으로 하고 이후로 이칠성, 그리고 맹감역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거론되는 것이 바로 마중군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소설 속 홍길동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등장하는 것처럼 구한말에 이르러 여러 명의 맹감역과 마중군이 나타났으니 이것은 흡사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여덟 개 의 분신을 팔도로 보내는 것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선언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본디부터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몸을 초야에 두고 혹은 경서를 읽고 밭을 갈았다. 그럼에도 마음은 항상 조정에 결어 만세의 일월을 받들었다. 중흥 이후 하늘이 어찌 재앙을 품어 요괴한 저 왜놈들이 와서 개화를 읊고 조정의 간신들과 부동하여 궁궐을 범하고 난을 일으키는데도 사직을 도울 사람이 없다. 어찌 통탄을 금치 못하랴. 무릇 사방의 오랑캐와 통하여온 이후 시장의 중요한 이권은 모두 저들이 약탈하고 그뿐만 아니라 백폐를 갖추어서 삼천리강산의 많은 민중이 이산하여 원성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보다 억울한 일이 있으랴.”
이러한 활빈당에 신입으로 들어갈 때는 꽤나 까다로웠다고 합니다. 함도결박(琀刀結縛)이라 하여 신입단원은 선배들이 둘러선 가운데 칼을 입에 물고 결박당한 채 땅에 무릎을 꿇고 매를 맞으면서 충성 서약식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체포되더라도 동료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로 화적출신이었지만 이 외에도 동학군에서 싸우던 사람들 그리고 먹고 살 것이 없어 들어온 양민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들어와 활빈당을 하게 되었고 적게는 10~20명, 많게는 100명 씩 떼를 지어 빈민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여기저기서 양반 부자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백성에게 나누어주었고 이에 더해 관아를 습격하여 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활빈당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도적으로만 활동했던 것은 아닙니다. 활빈당이라고 하는 이들이 대낮에 시장을 덮치기도 하고 배를 타고 서해안 여러 곳을 습격하거나 해적질을 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1890년에서 1905년에 이르는 사이 활빈당과 관련하여 처벌을 받은 이들은 무려 200 여명이 달했으며 그 기간 동안 신문에는 언제나 활빈당의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이 강화되기도 했지만 당시 조선고을의 군대가 허약하여 이를 막아내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1904년 이후 러일전쟁을 지나면서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의지를 들어냈고 일본 군대가 전국에 들어와 국내치안을 담당하면서 활빈당의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당했고 지도부가 무너지면서 활빈당도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면서 전국 가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활빈당도 부패한 관리와 토호를 목표를 삼았던 이전과는 달리 의병으로 흡수되어 활동을 이어나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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