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와 어재연장군의 수자기
2023. 4. 18. 21:1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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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6월, 미국에서 하나의 깃발이 우리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장수를 뜻하는 한자 ‘帥’가 쓰인 깃발로 가로 4.13m, 세로 4.30m의 큰 크기에 삼베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1871년 6월 10일 한강 어귀인 강화도에서 조선과 미국이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미국은 당시 전투에서 해당 기를 가져갔습니다. 당시 조선은 태극기 같은 국기가 없었으므로 이 장군기가 국경을 지키는 군대와 군사령관 본진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의 군대는 이러한 기를 걸고 싸웠고 이순신도 그러했습니다. 당시 광성보 전투에 참여한 윈필드 슐리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용감히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조선과 미국의 전투는 48시간 만에 끝이 났지만 이 전투로 미군에 비해 수십 배나 달하는 타격을 입은 조선군의 투쟁정신에 미군은 크게 감명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투 장소에 걸려 있던 수자기를 내리고 그 곳에 성조기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수자기가 내려지면서 오른쪽 아래가 일부가 찢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수자기를 미군이 전리품으로 챙겨갑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임대된 수자기는 현존 유일의 조선 시대 장군기입니다. 그리고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였던 조상들의 혼이 서려 잇는 그러한 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시 국제 정세는 어떠했을까. 당시 서양의 각 나라들은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세계 각지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무력으로 식민지를 늘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1842년에 아편전쟁을 일으켰으며 다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 진출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한 영국의 상인 모리슨은 조선 서해안에 교역을 요구하였다가 거부당해 청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조선 정부는 서양인과 교역을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중국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밀거래하고 있어 교류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영국공사 웨이드는 조선과 통상관계로 나갈 방법을 찾기로 했으며 조선 개항을 위해 조선 서해안 측량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이 조선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사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고 미국은 일본에 개방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이 배가 올라올 때 조선에서는 무조건 이를 멀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멀리서 온 손님이라고 인식하고 대접하려 한 것입니다. 실제로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866년 5월에는 미국배가 난파되었고 당시 미국선원들이 조선인들에 의해 구출되자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너럴셔먼호가 왔습니다. 이에 대해서 조선인들은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강경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는 통상과 개방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자 선원들은 약탈과 납치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를 중심으로 셔먼호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배에 무기가 많이 살려있었다는 사실을 미국과 영국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왜 무기를 잔뜩 가지고 왔을까. 당시 이들은 1866년 10월에 있을 병인양요를 예감하고 조선에 무기를 팔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민간상선인데 지구반대편으로 와 물건으로 팔려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행패를 부리다가 불태워진 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당장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 소식이 미국에게까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프랑스 측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전해 주었고 이것이 다시 미국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미국의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정 반대되는 두 가지 보고를 받게 됩니다. 하나는 셔먼호가 행패를 부리고 선제공격을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선제공격으로 정당방위였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선택은 후자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근거로 조선을 개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도 조선에 관심을 보였으나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이야기를 듣고 영국은 관심을 접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이 서양의 군대에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양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가 터졌습니다. 프랑스군이 침입한 것인데 프랑스군은 조선군과 교전을 벌이고 철수하였고 그 과정에서 외규장각 문서 등 서적과 문화재, 무기 등을 약탈해갔습니다. 이후 조선정부는 통상거부정책은 강화되었고 조선인들의 서양에 대한 반감은 커졌습니다. 여기에 더 조선인들은 더 반감을 크게 산 것은 바로 1868년 독일의 오페르트 도굴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하면서 흥성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입니다.
한편 미국은 공사 로우를 통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을 조선에게 청구하고 조선을 개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청나라를 이용하려 했으나 청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로우는 영국과 함께 함대를 파견하자고 하였고 영국공사 웨이드가 승낙했으나 영국 컬렛 제독이 영해군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며 작전을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은 단독으로 신미양요를 준비하였습니다.
‘조선 병사들은 헤라클레스처럼 힘이 세고 호랑이처럼 잔인하며 사격술은 윌리엄 텔만큼 백발백중이라는데!’
조선군과의 일전을 앞두고 미군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도 그들은 조선과 일전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주선과 수교협상을 맺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본 나가사키를 떠난 미국 군함들은 1871년 음력 4월 14일 강화도 손돌목 해역으로 침입해 왔습니다. 5척의 군함과 1200여명의 군인들, 남북전쟁을 마치고 이미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던 다른 유럽국가들을 따라잡으려는 미국이었고 조선은 그 타겟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표면적인 이유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무역협상에 나서라는 것이었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보복 공격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일본에게 썼던 방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미국이 불법적으로 영해를 침범한 것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에 미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습니다. 강화도의 덕진진, 초지진, 광성보에서 교전이 이루어졌고 초지진, 덕진진이 미국의 공격에 무너지자 조선군은 광성보에 몰려들었습니다.
‘남북전쟁 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을 쏟아 부은 적이 없었다.’ -미국의 블레이크 중령-
당시 조선군은 300여 년 전에 쓰던 화승총을 쓰고 있었고 사정거리는 120미터에 불과했습니다. 그에 비해 미군의 무기는 사정거리가 7배에 달했습니다. 미군의 화포는 화약이 터지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군은 포탄을 날려 보내는 원시적인 수준의 대포였습니다.
‘조선의 군사들은 용감하였다. 그들은 항복을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맨손으로 싸웠으며, 부상자는 돌이라 흙을 집어던지며 저항하였다. 나중에 전투가 불리해지자 잡히지 않으려고 바다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군의 전투모습은 인상적이었으나 조선군은 미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조정에서 확인한 전사자는 53명, 부상자는 24명이었으며 미군 측에서는 조선군이 3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당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승리했으나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흥선대원군은 미군을 물리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전국에 세워진 것은 바로 척화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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