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2023. 4. 26. 07:4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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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동

2020년은 우리나라에서 여자의사가 탄생한 지 12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후 수많은 의사들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의료를 담당했는데요. 우리나라 첫 여의사는 1900년에 우리나라에 귀국한 김정동으로 박에스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박에스더는 진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자격증을 가진 의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서재필이 1893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의 전신인 코크란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고 미국에서 의사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의사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에스더는 이 땅에서 환자진료에 헌신한 최초의 의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박에스더는 김정동이란 이름으로1877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김홍택이었고 어머니는 연안 이씨 사람으로 넷째 딸이 김정동이었습니다. 김홍택은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에서 근무했는데요. 이 학교는 미국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로 김홍택은 근대문물에 관심을 가졌고 막내딸이었던 김정동도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86년에 이화학당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여성선교회에서 조선의 여성교육과 선교를 위하여 파견한 메리 스크랜턴이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교육관은 “우리의 목표는 여인들이 우리 외국인들의 생황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추어 바뀌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의지에도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배재학당에는 신학문과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메리 스크랜턴의 이화학당에 지원자가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양반집 딸들은 내외가 심하여 접근조차 쉽지 않았고 가난한 집에서는 일손이 모자란다며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서양인들이 학교를 차려 아이들을 유괴해 간다는 소문마저 돌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일일이 집을 방문하여 그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뒤에 한 학생이 입학했지만 그는 등교하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학생은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가 맡기고 간 열 살짜리 꽃님이었고 세 번째 학생은 콜레라에 걸려 성 밖에 버려졌던 네 살짜리 별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입학한 학생은 바로 김정동이었습니다. 당시 김정동은 메리 스크랜턴을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박에스더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턴 부인을 처음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나를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잡아넣어 태워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게 만들었다.’
 김정동은 열심히 공부하였고 특히 영어를 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점동은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에스더란 세례명이었습니다. 이후 김정동은 에스더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김에스더로 불렸습니다.  
1890년에 김에스더는 보구여관에서 통역과 간호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보구여관은 1887년에 이화학당 내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으로 남녀를 한 병원에서 진료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이화학당 구내에 여성과 어린이만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자는 메리 스크랜턴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후원을 받아 세워진 이 병원은 ‘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1890년에 3대 병원장인 로제타 셔우트 홀이 약물학과, 생리학 등을 교육한 것이 이화의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박에스더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인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도 배출하였습니다. 
당시 보구여관에서 김에스더는 통역업무를 보고 있을 때 이 때 미국에서 온 여의사가 로제타 홀이었습니다. 어느 날 입술이 갈라진 아이 하나가 부모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속칭 ‘언청이’라고 하는 구순구개열 환아였습니다. 의사인 로제타 홀은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부모는 이를 곧이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술을 받고 난 뒤 아이가 붕대를 풀자 부모는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의사와 통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연거푸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김에스더는 자신도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점동은 로제타 홀의 남편의 소개로 박유산을 만났으며 그와 결혼하여 박에스더가 되었습니다. 박유산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김에스더의 부모가 탐탁치않게 여겼으나 둘은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 2년 뒤인 189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요. 로제타의 남편이 전염병환자를 돌보다 사망하게 되었고 박에스더는 박유산과 함께 로제타의 미국행 길에 동참한 것입니다.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최연소로 입학했고 남편 박유산은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의 학업을 도왔습니다. 당시 박유산과 에스더는 둘 다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이 일하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남편은 미국에서 상투를 틀고 다녔으므로 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제타의 남편이 이국땅에서 죽었듯 박유산 역시 박에스더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박에스더가 의과대학 졸업을 몇 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에스더는 그 슬픔을 뒤로 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개화의 물결과 함께 우리나라에 전등이 설치되던 1900년이었습니다. 
박에스더는 보구여관에서 일하면서 매년 5000여명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의료환경은 열악했고 여성들에 대한 것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여의사가 너무 귀하던 시절, 박에스더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귀국하고 난 뒤 몇 달 동안 3000명의 여성환자를 돌볼 정도로 열성이었습니다. 휴일이나 휴가도 없었고 평양의 여성전용병원인 광혜여원으로 옮기고 나서는 한 자리에서 환자를 기다리지만 않았습니다. 평안도, 황해도 이 곳  저 곳을 다니며 의료행위를 행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평안부인병원을 비롯하여 평안남북도와 항해도를 돌며 조선의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한편 여성교육의 필요성, 위생관념의 개선 등을 강연을 통해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오지의 사람들은 영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병이 들면 무당을 찾았으니 박에스더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박에스더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봐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로제타가 도입한 맹인을 위한 점자교육에도 힘썼습니다. 

로제타 홀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박에스더는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인데요. 박에스더의 죽음은 로제타뿐만 아니라 그를 이모처럼 따르던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에게 큰 슬픔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셔우드가 사업가의 꿈을 접고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셔우드를 미국에 두고 조선으로 로제타가 돌아와 여자의학교 만들기에 나섰습니다. 박에스더 이후 여의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1918년에는 여의사 3명이 나왔으며 1918년에는 여러 어려움을 딛고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세우게 되었으며 이는 고려대학 의과대학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셔우드 홀도 한국에서 의료 활동을 했는데요. 그는 1928년에 해주에 한국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1932년에는 국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 퇴치기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이후 2008년에는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여성최초로 박에스더가 헌정되었습니다. 박에스더와 메리 스크랜턴과 윌리엄 스크랜턴, 그리고 로제타 홀과 셔우드 홀 이들은 모두 한국 근대 의료 역사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배우게 한다.’- 로제타 홀-
그리고 2021년 인천기독병원 100주년을 기념하며 로제타 홀 기념관을 답동에 개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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