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조선에 불었던 영어열풍
2023. 5. 17. 20:2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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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 청어, 왜어, 몽골어를 모두 알지 못했습니다. 붓을 줘 쓰게 했더니 모양새가 구름,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1797년 부산 용당포에 영국 함대 프로비던스호에 올라서 서양인을 만나고 돌아온 관찰사 이형원은 영어 알파벳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882년 제물포에 마련된 조미통상조약장에서 통역을 맡은 사람은 마젠쭝이었습니다. 따라서 영어의 절박성을 느낀 것은 고종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고급 인력을 영어 교사로 초빙해 왕립영어학교를 만들고 경복궁에서 직접 영어 시험감독에 나설 만큼 열심이었습니다. 고종에게 있어 근대화란 곧 영어습득이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영어교사는 토마스 에드워드 핼리팩스이란 사람으로 그는 조선 정부에 고용돼 조선인 해관(海官)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에는 그의 기고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제목은 바로 `기이하지만 아름답고 강인한 나라'였습니다. 핼리팩스는 영국의 웨스트베리 출생으로 조선의 외교와 세관업무를 맡았던 일인 외교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1848년∼1901)의 추천을 받아 최초의 관립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영어 교사로 1883년 채용되었습니다. 이후 1886년 동문학이 폐교되자 초창기 전신(電信) 사업에 참여해 조선 정부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품계를 받았으며, 그 뒤 일본에 건너갔다가 1895년 조선에 돌아와 관립 한성영어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의 기고문은 "내가 처음 조선에 상륙해 느낀 점은 조선인의 풍속이 기이하다는 것이다"라고 시작합니다. 핼리팩스에게 커다란 자루 같은 버선, 입에 문 긴 담뱃대, 대나무를 쪼갠 살을 엮어 만든 모자, 쌀밥에 찬물을 끼얹어 먹는 식습관 등 모든 게 그에게 낯설었습니다. 그는 기고문 곳곳에서 관리의 부패나 저잣거리의 불결함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조선인의 성품에 대해서는 "내가 6년간 조선에 있는 동안 (조선인이) 결코 난폭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고, 내가 싫다고 생각하는 일에 빠지게 한 적도 없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글 끝 부분에서도 "민족으로서 아름답고 몸이 강하며 강인한 사람들이다. 지니고 태어난 기질도 솔직하고 온순하며 손님을 접대할 때 진심으로서 친절하게 대한다."라고 조선인을 칭송했습니다. 한편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상세히 전했습니다. ‘조선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청나라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아 광산 같은 것도 마음대로 채굴할 수 없다.’라고 하며 "(청ㆍ일이 개입한) 전신선 설치는 일반인의 통신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며 주변국들의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도 서술했습니다. 핼리팩스는 "왕은 용모가 아름답고도 총명한 사람이지만 왕뿐 아니라 왕비도 국정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적어도 외국인들에게 명성왕후는 호감을 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땅에는 한글 열풍보다 영어 열풍이 먼저 불었던 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독랍신문」은 1896년 창간하면서 한글을 전면적인 표기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신문의 4면은 영문판이었습니다. 이 땅에 최초로 성경이 전해진 것은 알세스트호와 리라호의 함장 맥스웰과 바실 홀이 충남 서천군 마량진에 도착한 1816년 9월이었고 당시 성경은 아마 영어로 적혀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이 땅에 없었고 66년이 지나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14년이 지난 후에 영문판 신문이 발간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1976년 개항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언어, 특히 영어 학습과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886년 ‘나라에서 영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육영공원을 설치해 국가적 차원에서 영어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육영공원은 40여 명의 학생에게 지리, 수학, 역사 등을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지금 각 나라와 교류하는 대 있어 어학이 가장 긴급한 일이다. 이에 따로 공립학교를 설립하고 나이 어리고 영민한 자를 뽑아 배우게 한다.’ -육영공원 학칙 중-
‘양반인 장씨의 아들은 왕명으로 통역에 임명됐다. F와 P의 발음을 구분해 발음하던 19세의 젊은이는 영어의 해석과 회화에 완벽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A. H. 새비지 랜도어
당시 조선의 선발된 엘리트들은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교육을 받으면서 실력이 늘어갔습니다. 그들은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모두를 해냈습니다. 그리고 ‘F와 P 발음도 구분 못하던 열아홉살 젊은이가 두 달 만에 영어 해석과 회화에 완벽해졌다고.’고 평가했습니다. 그렇게 육영공원이 제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그 중 한 명은 「독립신문」에 이러한 글을 실었습니다.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서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과 같이 되길 바라노라.’ 이완용.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들이 배재학당을 세우면서 관리들이나 양반 자제에게만 시행되던 영어 교육이 일반 백성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서구와 아세아가 교역하여 우리의 적고 비루함으로 저들의 우수하고 뛰어난 점을 취하여 열강과 겨루려면 어학이 필요하다.”고 한 사람 중에 바로 천연두를 물리치는 데 열정을 쏟은 지석영도 있었습니다. 그는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한자학습서 <아학편>을 기본 체제로 삼아 새로운 어학교재를 개발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중국어와 일어, 영어 등에 능통했던 전용규로 하여금 2천개의 한자에 대해 훈과 음, 한자에 대응하는 중국어·일본어·한글 발음, 한·일·영문 주석을 달아 서로 대조하여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영어 열풍이 불던 당시 영어교육은 실용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과거제 폐지 이후에는 서구식 신식학교 출신의 지식인들이 엘리트층으로 떠오르면서 이는 영어 통달이 출세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되었습니다. 배재학당에 몰려든 조선학생들에게 당시 교장이던 아펜젤러가 왜 영어를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출세하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럼 당시에는 어떤 방식으로 영어 수업이 이루어졌을까. 당시는 문법을 위주로 배웠다기보다는 원어민들이 직접 와서 프리토킹 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영어책을 복원해 보았는데 타다, ride 앞에 '으'를 붙여주면서 r 발음을 유도해 주고 있었습니다. 회화 중심 수업 덕분에 조선인의 영어 실력은 널리 인정받았고 한 일본인 관리는 자신의 책에 조선사람이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라고 평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이 땅의 사람들은 외국인 앞에 서면 왠지 긴장돼 대화를 못 하곤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지면서 미국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친미적인 성향을 지닌 정치인들이 자기 살 길을 찾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친일파로 돌아섰으며 영어로 출세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권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이후 우리나라에도 대학설립이 허가되었는데 당시 강단에서 가르치는 교재는 영국에서 들여왔으니 큰 문제는 없었으나 선생이 일본인들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Elevator’를 ‘에레베따’, ‘Necktie’를 ‘네꾸다이’, ‘Butter’를 ‘빠다’, ‘Ham’을 ‘해무’, ’McDonald’를 ‘마꾸도나르도’를 읽으며 가나문자로 발음 나는대로 썼습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 말로 가면서 일본과 미국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인과 영국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면서 원어민들이 없는 상황에서 문법을 위주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문법 위주의 교육은 조선인의 영어 실력을 정반대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영어교육이 없어졌다가 광복 후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 때 부임한 영어 교사들은 일제 강점기 시기에 문법식으로 영어를 공부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이 쭉 이어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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