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역사현장 덕수궁

2023. 4. 19. 21:1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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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덕수궁은 본래 경운궁이라는 이름이었으며 조선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집이었습니다. 개인의 집이 궁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이란 큰 난리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전쟁터였던 조선의 피해는 워낙에 컸고 당시 임금 선조가 한양에 돌아왔을 때에는 머물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머문 곳이 바로 덕수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리가 협소했으므로 선조는 주변 왕족과 고위관리들의 집을 궁으로 편입시켰고 이때부터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때 경운궁은 ‘경사스러운 기운이 모여 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615년에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습니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조는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며 선조가 머물던 석어당과 즉조당만은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경운궁이 다시 왕궁으로 사용된 것은 고종황제 때의 일입니다. 고종황제가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이 곳을 왕궁으로 택했고 이로써 경운궁은 조선에서 제일 가는 궁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규모도 넓히게 되었고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졌으니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 · 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당시의 정동 일대에는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덕수궁도 근대문물을 받아들었으니 덕수궁과 그 주변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함녕전 뒤편에 있는 정관헌으로 이 건물은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입니다. 그리고 석조전은 내부와 외부가 모두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거처하는 궁궐에 서양식 건물양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당시 가지고 있던 고종의 생각 즉,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중화문과 중화전


한편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을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습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고 궁의 정문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종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도 이곳에 거처하였으며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종의 이 궁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비극적인 역사의 장면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을사늑약으로, 덕수궁 내 건물 중 중면전에서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없어지고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덕수궁이 안고가야 했던 비참한 순간들은 계속되었습니다. 일제는 1910년대에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를 석조전 근처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남대문을 잇는 태평로를 개설하면서 동편인 포덕문 구역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황실도서관인 동시에 고종의 집무실이기도 했던 중명전 구역의 여러 전각들이 해체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덕수궁에 대한 훼손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1920년 4월 선원전 영역을 해체해 조선은행, 식산은행, 경성일보사에 팔아버리는가 한편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있어 궁궐 내 사당 역할을 했던 선원전은 사라졌습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의 완공과 함께 태평로의 확장이 추진되면서 덕수궁 동편 지역에 있던 복녕당, 보현당 등 후궁과 나인들의 처소, 소주방, 생과방 등이 없어졌으며 대한문도 50m 넘게 뒤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1931년에는 덕수궁을 ‘중앙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발표돼 이듬해부터 석조전이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전시장으로 바뀌었고 운동장과 휴게소, 매점 등의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이렇게 덕수궁은 헐리고 개조되어 1930년 덕수궁에 남아있던 건물은 당(堂)이 7개, 전(殿)이 6개, 헌(軒)이 5개였으며 이후 공원화 작업에 따라 10개 건물이 추가로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모습은 당시의 위상에 미치지 못한다 할 수 있습니다. 덕수궁은 조선의 궁궐 중에서도 조선 말기가 되어서야 그에 걸맞는 위치를 갖게 된 곳이고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독특한 공간입니다. 그와 동시에 짧지만 잊혀져서는 안 될 구한말의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간직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수궁 석조전


이러한 덕수궁의 구한말의 역사의 한 페이지로 아직까지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의 포화로 서울의 문화재가 사려질 것을 우려한 당시 주일대표부 공사로 있던 김용주는 고민을 한 끝에 그는 맥아더 장군을 찾아갑니다. 500년 고도의 문화재를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맥아더 장군에게 서울 작전에 대해 의견을 물었고 서울을 포화하기보다는 포위하는 작전으로 가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맥아더 장군은 거절합니다. 도시는 파괴된 뒤에 다시 거듭날 수 있다면서 미국의 전후복구를 책임지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김용주는 덕수궁과 경복궁, 창덕궁, 남대문 등 지도를 표시해주며 4대문 안 도심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고 맥아더 장군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9월 19일에서 13일까지 덕수궁일대와 종로의 거리는 폭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한 미군장교의 결단도 덕수궁 보존에 한몫했습니다. 바로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였습니다. 때는 1950년 9월 25일이었습니다. 당시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바로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을 포격하면 수 백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그 장비를 괴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고궁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때맞춰 포격을 하지 않으면 아군의 피해도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덕수궁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포격개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덕수궁을 나온 북한군이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보고가 들어온 뒤에야 포격개시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서울 덕수궁에 포격 명령이 갑자기 내려졌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일! 과연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조선의 왕궁을 내 손으로 파괴해야 하는가. (…) 결국 나는 앤더슨 대위와 상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생각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우리는 이에 대해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몬테카시오 수도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 고궁을 살리는 데 최대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2014년에는 조지 클루니가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맡은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이 개봉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나치로 인해 세기의 문화유산을 모두 잃을 위기 속 인류의 걸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예술품 전담부대 모뉴먼츠 맨의 숨겨진 실화를 그린 작품입니다. 따라서 덕수궁을 지키는 김용주와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전쟁 당시의 모뉴먼츠 맨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도 안되지만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도 아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하고 적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효과적인 작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재를 폭격해야 한다면 상당한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명과 더불어 문화재도 보호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후대에 많은 것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수궁은 그렇게 우리 곁에 서 있을 수 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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