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과 미국에겐 거중조정이란.
2023. 3. 18. 09:4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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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조선은 처음으로 서양과 수교를 맺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조선을 대표해서 신헌과 김홍집이 앉았고 미국 측에서는 해군제독 출신인 슈펠츠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외교관인 마건충이 통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이중통역을 통하여 조약의 첫 번째에는 상대국이 어려움을 당하면 반드시 서로 돕는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중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을 노리고 있던 주변국이 있었으니 그것은 러시아와 일본이었습니다. 만약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경우 이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북진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실 조선과 미국의 인연은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전에 신미양요가 있던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300여 명에 달했고 미군 전사자는 3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장수를 상징하는 깃발인 수자기를 미국이 약탈해갔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데에는 청나라가 집요하게 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종은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자본주의가 아직 유럽보다 뒤쳐져있었고 영토가 넓어 식민지에 대한 필요성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여타 유럽국가와는 달리 식민지가 적었으므로 그 점이 고종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은 왜 조선과 수교를 맺었을까. 미국은 우리나라와의 수교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디딤돌로 보았습니다. 당시 중국의 유럽 열강들의 각축장이었으므로 미국이 끼어들기에는 다소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에는 금이 많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동양 최대의 금광인 운산이 있었지만 미국이 생각한 것만큼 조선은 부유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외교관을 파견할 때에 임명된 가장 높은 직급이 바로 특명전권공사였고 조선에 파견된 것도 특명전권공사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실상을 알고 나서 그보다 한단계 아래인 변리공사로 1년 만에 격하하게 됩니다.
이 시기 이하영은 찹쌀떡 장사로 돈을 벌다가 나중에는 외교부 장관에까지 오릅니다. 어떻게 그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까. 그 발판에는 영어가 있었습니다. 이하영은 부산 동래군 촌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하고 찹쌀떡 장수로 근근히 살아가다 일본인 상점 점원으로 들어가 일어를 익혔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벌였다가 돈만 날리고 귀국합니다. 그리고 귀국하는 길에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알렌입니다. 이하영은 알렌에게 조선말을 가르쳐주고 알렌으로부터 영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통역으로 외무부주사로 특채되었고 곧이어 박정양 전권대사를 비롯한 주미공사관이 출국할 때 2등 서기관으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당시 이들 일행은 미국 클리블랜트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큰절을 하여 미국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이 우스웠을지 몰라도 이하영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 당시 조선관원들의 모습이 서양인들에게 웃음거리로 보여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상대적으로 미국 상류사회에서는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 신비감마저 자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인기도 높았습니다.
한편 이 때에 이하영은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았는데 부산, 인천, 원산 항만을 담보로 200만 달러를 차입하여 일본군과 맞설 수 있는 군대를 모집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외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는 먼로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뉴욕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올 수 없었습니다. 이와 별개로 이하영은 미국 사회 사교파티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바 금발미녀들로부터 청혼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조선의 법으로 외국여인과 결혼을 금지한다고 이야기하였지만 오히려 미녀의 어머니가 조선국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내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하영은 아내가 있던 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가 자리했던 주미공사의 자리는 이완용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하영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는 철도부설을 처음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최초의 고무제품은 대륙고무주식회사가 1922년 8월 5일에 낸 ‘대장군’이라는 상표를 달아 출시한 검정고무신인데 이 제품을 만든 회사가 이하영이 개화파 거물 박영효·윤치호 등을 주주로 영입해 1919년 경성 원효정(현 용산구 원효로)에 설립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하영이 조선에 처음 철도부설을 제안했는데 아무래도 당시 자금과 기술력이 부족했으므로 실행에 옮기기에 무리가 따랐습니다. 여기에 경인선 부설을 1896년 3월 미국인 모오스에게 넘겼는데 여기에 더불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이완용은 친일파의 대명사로 인식되지만 사실 그는 이전에는 친미파였습니다. 그는 어려서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는 과거에도 합격하였습ㄴ다. 이후 4년 뒤인 1886년에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이완용은 고종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근대식 국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이 설립되었고 여기에 이완용이 입학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두드러졌던 이완용은 1년 만에 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미국은 충분히 조선이 기댈만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모스를 만난 것입니다. 당시 모스는 일본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이웃나라인 조선의 광산과 철도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때 도움을 준 것이 또 알렌이었습니다. 알렌은 미국의 외교관신분으로 대놓고 투자할수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알렌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아메리칸 트레이딩 사장인 모스인 것입니다. 모스는 알렌의 후원자였고 알렌은 이전에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하여 신임을 얻은 힘을 바탕으로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모스에게 조선의 이권을 넘겨겼습니다. 그리고 이에 공감한 것이 바로 이완용과 이하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하영이 조선에 귀국하면서 조정에 바친 선물이 바로 기차모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스가 초청되었으나 조정의 반대가 극심했고 결국 철도 부설논의가 중단되었습니다. 막대한 부설비용이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위축된 시기였고 재정도 넉넉하지 못했던 지라 모스가 철도부설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근대를 여는 중요한 사회적 도구인 철도를 외국에 넘겨주었다는 비판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갈아탔습니다. 그는 친미적 성향을 띨 때에는 철저하게 일본을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을미사변 이후에 고종이 일제에 의해 고립되어 있을 때에 춘생문을 통해서 고종을 몰래 빠져나오게 했을 때에 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친미성향을 띠면서 그 시기에 따라 억압하려는 세력이 따라 배척했으니 반중, 반일, 반러 이런 식으로 자신의 성향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조정 내에 친미파가 사라지면서 이완용도 자연스럽게 친일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럼 고종은 어땠을까. 당시 고종은 미관파천을 계획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보았고 이에 고종은 러시아가 불리해질 상황에 대비하여 이완용을 통해 미국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공사였던 알렌이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서로 간에 돕겠다고 한 미국은 일본과 또다른 밀약을 맺습니다. 그것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과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한 가쓰라 태프트밀약이었습니다. 그리고 4개월 뒤 벌어진 것은 을사늑약으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알지 못했던 조선은 헐버트를 통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쓰인 거중조정 조항은 미국을 왜 지키지 않았을까. 당시 조선은 이를 동맹으로 이해했지만 미국은 이를 그저 국제법상 중재조항으로 보았고 꼭 지킬 필요가 없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미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일본에 더 호감을 보였고 이를 고종은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헐버트, 아펜젤러, 알렌 같은 조선에 우호적인 미국인들이 있었으니 고종입장에서는 제국주의로 걸어가려는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어려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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