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뒤의 권력자 명성왕후
2023. 3. 16. 09:4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728x90
고종은 1863년 왕위에 올랐으니 당시그의 나이 12세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아직 미혼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철종의 3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1866년에 되어서야 혼례를 올립니다. 그렇게 정한 고종의 배필이 바로 명성왕후입니다. 명성왕후의 아버지는 민치록이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이었습니다. 조선후기의 명문가였으나 민치록 대에는 이전의 위상보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되도록 한미한 가문출신의 며느리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1866년 고종이 명성왕후와 결혼을 하게 되니 당시 나의 16세였습니다. 사실 명성왕후의 집안이 흥선대원군이 한미하다고 판단할 만큼 그 정도로 보잘 것 없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여흥 민씨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 원경왕후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숙종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배출하고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명성왕후의 증조부와 조부는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냈고 이런 집안 배경 덕분에 명성왕후의 부친 민치록은 음서로 벼슬을 얻어 종4품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문별 문과 급제자수를 살펴본다면 여흥 민씨 집안은 10위에 위치할 만큼 나름 조선관직에 많은 인적자원을 재출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흥선대원군이 이러한 여흥 민씨 집안과의 혼인으로 기대했던 것은 안동 김씨 집안을 억누름과 동시에 이들도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중간키에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곧았다. 얼굴은 길고 이마는 높으며 코는 길고 가늘어 귀족적인데 입과 아래턱에는 결단력과 개성이 드러난다. 광대뼈는 두드러지고 귀는 작으며, 얼굴은 기름진 저지 크림색을 띄었고, 눈썹은 아치모양이며, 아몬드 형의 눈은 지적이고 예리해 보였다” (프랭크 카펜터)
“왕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이사벨라 비숍)
이러한 명성왕후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는 후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명성왕후와 4번이나 식사했던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명성왕후가 가지고 있는 시베리아와 일본 철도의 건설비, 청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시각 등 꽤나 깊은 질문을 한 것에 인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명성왕후는 흥선대원군의 바램과는 반대로 정치에 야망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조선을 장악하려 한 여인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고종은 집권기간 상당 부분을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12살이었던 때에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했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섭정했습니다. 물론 이 때에는 그가 어렸다는 변명이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에 그를 대신한 것은 명성황후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씨와 척족에 의한 정치는 1874년부터 189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중 명성왕후를 받든 조력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그의 인척오빠 민승호였습니다. 그는 병조판서를 지내며 국정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한 일은 흥선대원군이 발탁한 사람들이나 남인, 북인들을 파직하고 사직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씨의 정치로 흥선대원군이 했던 쇄국정치는 개항의 흐름으로 갈아타게 되었습니다.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을 맺었고 그러면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식군대와 신시군대간의 갈등이 불거졌는데 이른바 임오군란이 터진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갑신정변이 터지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명성왕후는 이러한 고난을 타개하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입니다. 한편 당시 조선은 조선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의 줄다리기가 심해지자 내놓은 것이 바로 서양열강과의 수교였습니다.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1884년 영국과 독일, 1885년 러시아, 1886년 이탈리아, 1887년 독일과 수교를 맺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쟁탈전을 더욱 심화되었고 톈진조약을 통해 두 나라가 조선에서 서로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 상대 나라에 그 사실을 통보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처는 1894년 청일전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명성왕후가 죽게 된 것은 1895년 을미사변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13년이 앞선 1882년 그의 장례식이 치루어졌습니다. 어찌된 일일까. 당시 임오군란으로 명성왕후는 피신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명성왕후의 시신도 확인하지 않고 흥선대원군이 명성왕후의 국상을 선포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선택한 며느리가 정치적으로 적이 되어 버린 이상 어떡해서든 제거하고 싶었고 그게 안되면 죽은 사람으로라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간의 갈등은 이보다 앞서 벌어진 일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때는 1871년, 명성왕후가 회임을 합니다. 이에 대원군은 급히 아들 내외에게 산삼을 전합니다. 그리고 11월 명성황후는 원자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나흘 만에 숨을 거두었고 그 원인을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보내준 산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874년에는 명성황후의 오빠 민승호의 집에 상자가 하나 배달되었습니다. 상자를 전달한 이는 기도하는 곳에서 왔다며 스님 말씀으로는 밀실로 가서 열어보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이 속에는 복이 있으니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민승호가 상자를 열자 폭발하였고 민승호와 함께 그의 10살된 아들, 그리고 할머니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명성왕후는 이러한 폭발사고의 배후에는 흥선대원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흥선대원군이 대신 나선 고종의 뒤에서 정치를 도운 명성왕후는 어떠했을까.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1884년 갑신정변부터 10년 동안 부정부패가 극도에 치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외척들이 세력을 믿고 방자한 짓을 하고 탐육과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큰 잔치를 매년 열었고 밤샌 연회가 낮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허비된 비용은 수만금이 되었으니 이것들이 다 백성들에게서 나온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에 돈을 바치고 관직을 얻었으며 그로 인한 부정부패로 인해 백성들에 대한 수탈로 이어져 봉기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민영주(1846∽미상)는 유생 시절부터 서울의 부자들과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인 한강 · 서강 · 마포나루등의 거상(巨商)의 재물을 약탈하였고 민두호가 유수로 부임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강원도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뿔뿔이 흩어졌으며 민형식은 당시 국가 세입 480만 냥의 15%에 해당하는 70만 냥을 치부하여 나라의 도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척정치의 중심에 선 명성왕후에 대해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국고를 탕진한 여자’라고 비판하고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우리의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나쁩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명성왕후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인 이유는 그가 외국인들에게 유독 호의적으로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조선을 위한 정책의 일환인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던 1895년 10월 8일 일반낭인들이 들이닥쳐 명성황후를 제거합니다. 그리고 명성왕후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 흥선대원군이 입궐합니다. 그리고 사건 다음날인 10월 9일 명성왕후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음을 암시한 기사가 실립니다. 사실 이 때 흥선대원군을 입궐을 꺼렸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입궐을 한 이유는 일본이 손자 이준용을 해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배후인물은 흥선대원군이었을까. 그가 입궐을 꺼리는 동안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모르게 명성왕후를 제거하려는 일본의 목적은 날이 밝은 뒤에 빠져나오게 됨으로써 명성왕후의 죽음을 조작하려는 일본의 만행은 감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구한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과 미국에겐 거중조정이란. (0) | 2023.03.18 |
---|---|
사라진 고종의 돈 그리고 헐버트 (0) | 2023.03.17 |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왜 사이가 좋지 못했나. (2) | 2023.03.14 |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만남,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0) | 2023.01.28 |
교세확장이냐, 동학농민운동이냐. 최시형과 전봉준 (1) | 2023.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