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왜 사이가 좋지 못했나.
2023. 3. 14. 09:4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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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흥선대원군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쇄국정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가 세운 척화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쇄국정책이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갑오개혁 이후에나 사용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을 설명하면서 쇄국정책이란 말이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정책을 설명할 단어로 당시의 상황에서 찾는다면 해금정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해금이란 바다를 통한 왕래와 교역을 금지한다는 것으로 사실 이것도 주로 중국왕조에서 사용하던 대외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조선왕조에서도 적용되었는데 중국 상선도 조선에 배를 타고 와서 무역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서양 배들이 와서 하는 통상요구는 받아들여질 리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흥선대원군이 하는 일련의 대외정책들이 기존의 조선왕조의 것을 따랐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서양에 대해 처음부터 배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 남종삼이 있었는데 그는 대원군에게 프랑스를 끌어들여 러시아 세력을 막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마침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의 두만강 국경과 맞닿아 있던 시기라 이를 크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천주교 베르누 주교를 통해 북경에 연락하여 영국과 프랑스 양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 봉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베르누 주교가 외교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난색을 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시의 주변국들은 어떠했을까.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지향적이 나라로 바꾸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1871년에는 신분해방령을 내리고 모든 국민이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1871년에서 1873년 사이에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 국비유학생을 대거 파견했는데, 그 비용이 1872~1873년 교육 예산의 약 10%였습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기 수십 년 전에 청나라는 영국과의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시작으로 서강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실권자로 있는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었습니다. 조선의 피해가 더 컸던 싸움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조선이 승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에 도취한 조선은 전국 도처에 척화비를 세우며 그 의지를 다진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그의 정책에는 천주교가 왕권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한 몫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펼친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종이 나이가 차면서 친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장차 왜와 중국이 교역을 한다는데 그게 정말 사실인가?’ 『일성록』
고종은 이러한 물음을 던집니다. 그는 긴박한 국제정세에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친정을 선언한다는 것은 그 동안 흥선대원군이 고수해온 쇄국정책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통리기무아문을 세웠는데 변화하는 국내외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외의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총괄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정1품아문(正一品衙門) 관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 시찰단을 보내 개방과 개혁의 추진을 탐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비밀리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개화정책에 걸림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고종은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종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으니 그가 하는 개화정책에 위협을 느낀 세력과 그의 개화정책이 너무 느리다는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후 흥선대원군이 다시 재집권하는 기회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임오군란이 터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창설과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난리입니다. 1882년 구식군인들의 불만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는데 13개월 동안 밀린 급료로 지급된 것은 절반이 되지 않은 양으로 그마저도 썩어있었다고 합니다. 구식군인들의 폭동에 고종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이들도 가담하였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바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청나라군대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체포하여 자신의 나라로 압송한 것입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3년 동안 포로신세가 되었습니다. 한편 다시 한 번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는 일이 생기니 그것은 바로 갑신정변이었습니다.
한편 고종시기에 있었던 강화도조약에 대해 기존의 불평등 조약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이것이 고종의 개국과 개화의지가 투여된 능동적 조약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간의 알려진 고종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이 자주의식에 잘못 빠져들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며 그의 폐위를 건의하기도 했으며 일본이 조선을 장악한 상황에서 일본이 대한제국의 황실을 특별히 보호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에는 고종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문제는 고종의 개화정책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종이 학문연구기관으로 집현전을 활용했다면 고종은 자신의 개화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합니다.또한 기술을 습득할 유학생에 대해 고종이 직접 선발기준을 말했음에도 인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출발 직전에야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맞춘 인원 중에는 실제로 자격이 미달인 사람도 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비마저 일정하지 못해 청에 돈을 빌려 유학생들의 식비를 조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무기공장을 설립을 계획하였는데 공장에 제작기계를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막대한 자금과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급하게 소형의 수동식 기계로 전환했으니 당시 개화정책에 동조했던 세력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기계를 다룰 외국인 기술자를 제대로 고용하지 못했고 국내 기술자들은 기초과학기술도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어서 기술이전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설치된 기기창은 제대로 활용이 되지 못했고 결국 외국산 무기를 수입하는 데에 급급했습니다. 고종의 개화정책이 실패한 데에는 의지만 있었을 뿐, 이것을 이끌 전문인력을 양성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통리기무아문의 설치에 대한 고종의 의도도 의문입니다. 그가 이 기구의 설치를 통해 유교국가이면서 봉건질서였던 조선에서 좀 더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 아니라 외세의 무력 시위 앞에 권력기반마저 위협받았던 고종이 어쩔 수 없이 자생책으로 택한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개화의 의지도 있었지만 거기에는 기존의 조선이 가지고 있던 체제에 대한 대폭수정이 아닌 기존의 것을 안고 개화를 시도하려 했으니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이하응은 “내가 주상을 알현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나?”라고 하였다. 잠시 후 그는 어가가 오지 않느냐고 물은 다음 긴 탄식을 하고 운명하였다.’ 『매천야록』
‘고종황제는 흥선대원군의 문상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윤치호일기』
흥선대원군은 79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 때 고종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유교국가이던 조선에서 효를 제일로 하는데 고종의 이러한 행동이 많은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고종도 알았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그리고 고종의 개화정책이 부딪히면서 빚어낸 갈등만이 이들 사이를 이렇게까지 만든 것은 아닙니다. 1881년에 이하응은 자신의 서자인 이재선을 충동질하여 왕위에 올려보려고 했고 1886년과 1894년에도 흥선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의 조카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니 국가최고군력을 두고 벌인 부자간의 갈등에 고종도 아들로서 지쳐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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