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확장이냐, 동학농민운동이냐. 최시형과 전봉준
2023. 1. 20. 18:5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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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 새벽 전라남도 고부의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한 이유는 탐관오리의 수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러한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만석보의 개수 문제에 따른 수세 징수사건과 더불어 온갖 세금착취와 농민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재물을 강탈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대동미를 정미(精米)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이 나쁜 쌀을 사서 상납하는 방법으로 차액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탐관오리의 횡포로 시작된 고부관아 습격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민란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부에서의 항거를 기점으로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사람은 전봉준입니다. 그는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한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은 그와 같은 의견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같은 배를 타고도 다른 생각을 했을까.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일어난 때와 운동의 주체에 의미를 두어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탐관오리의 수탈에 못이겨 1년 간 이어진 이 항쟁의 중심에는 전봉준이 있었고 그는 고부 지역의 동학접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고부관아로 들어선 동학농민군은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까. 그들은 농민들의 수탈에 동참한 아전들을 혼내주고 창고에 있던 곡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당시 농민들의 고부관아 습격사건은 조정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에 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태수습을 명분으로 동학농민운동은 탄압하였으므로 이는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전봉준은 무장운동을 결의하고 동학도들을 모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인 이들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과 손화중을 총관령으로 하여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뜻이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다.”이란 격문을 발표, 이후 조선관군 및 외세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당시 이들을 토벌하여 내려온 조선관군은 동학농민군의 꾀임에 넘어갔는데 야영을 하던 관군은 기생까지 불러들여 술판을 벌였다고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러한 관군을 상대로 동하농민군은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혁명군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여파로 1894년 4월 9일 무장, 12일에는 영광, 16일에는 함평을 점령하고 21일에는 장성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동학농민군을 추격한 조선관군은 다시 동학농민군의 유인책에 걸러들여 대나무 닭장을 이용한 장태전법으로 황룡촌전투에서 타격을 입습니다. 이후 전주로 북상한 동학농민군은 27일 대포를 쏘아올려 시장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수많은 장꾼들이 놀라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으로 몰려들게 되었느데 그 틈새에 혁명군이 끼었습니다. 말그대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하게 된 것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승전이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의 점령으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위기감을 느낀 조선의 조정은 해서는 안될 선택은 하게 됩니다. 그것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한 것입니다. 이러한 청나라군사의 개입은 동학농민운동 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의 힘을 빌려 혼란을 수습하려 했고 동학농민운동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여기에 일본군도 조선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일본군이 조선땅에 들어온 것은 바로 1884년 갑신정변을 처리하면서 맺은 톈진 조약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더욱 당황한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군과 협정을 맺기로 합니다.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던 동학농민운동군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국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조선정부와 협상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전주화약으로 농민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했으며 조선정부도 일본군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2차 농민봉기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전봉준과 최시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농민봉기를 일으키려는 전봉준을 최시형은 만류하고 오히려 동학교도들에게 전봉준을 벌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동학농민운동을 집결시킨 사상적 모태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당시에 들어온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종교입니다. 우리 고유의 신앙과 더불어 유불선을 담은 이 종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사상을 담아 빠르게 퍼졌습니다. 인내천 사상은 곧 평등사상이므로 신분제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던 조선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고 이에 조선 조정은 혹세무민을 이유로 동학의 제1대 교주 최제우를 처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제 2대 교주가 된 것은 최시형이었습니다. 그는 동학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숨어지냈으며 별명이 ‘최보따리’라 불리는 만큼 그는 보따리를 싸서 도망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정리해 편찬하고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로 동학은 퍼져나갔고 조선정부의 탄압도 심해졌습니다. 더불어 동학 내에 갈등도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시형은 교리전파와 교세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의 남접세력은 조선사회의 개혁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막 시작되었을 때 최시형은 봉기를 거두라고 말할 정도로 입장차이가 컸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동학농민운동은 진행될 대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전봉준은 최시형의 북접세력에 손을 내밀고 있었고 그럼에도 최시형은 이에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고 공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시형은 북접세력에게 전봉준의 농민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는 곧 천운이 다다른 것이니 교인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하고 스승의 억울함을 신원하며 우리 도의 대원을 실현하라.”
최시형은 이런 선택을 한 데에는 어쩔 수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접이든 남접이든 조선의 정부에서는 제거해야 대상으로 찍혀있었고 북접의 내부에서도 전봉준의 농민봉기를 도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접의 지도자 전봉준과 북접의 지도자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이 합세하여 우금치로 몰려들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상대해야 할 상대는 관군 2500명과 일본군 200명이었습니다. 농민군은 만 명이었기 때문에 숫적인 우세에 있었을지 몰라도 하지만 근대화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 농민군은 처참하게 쓰러져만 갔습니다. 일본군의 무기는 사거리 수백미터에 1초당 1발씩 발사되는 근대식 총이었던 반면에 동학농민군의 주력화기인 화승총은 1발을 발사하는 데에 30초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사거리도 관군의 무기에 비해 10분의 일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화기보다는 죽창이 동학농민군의 주력무기였을 것입니다. 또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관군을 상대로 동학농민군이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동학농민군은 전통적인 전술로 밀집대형을 하고 있었는데 1㎞에 달하는 오르막길을 아무런 엄폐물 없이 내달린 동학농민군은 근대식 무기에게 조준사격을 당해 참사가 더욱 커졌습니다.
“남은 천여명이 여지없이 무너졌는데 새벽하늘에 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고 가을 바람의 낙엽과 같았다. 길에 버려진 총과 창, 밭 둔덕에 버려진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에 차였다” 관군의 이두황
그렇게 우금치전투의 패배와 함께 전봉준은 전라도지역에서 잡혀 처형당했고 최시형도 그 후로 4년을 피해 다니다가 강원도 원주에서 붙잡혀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동참한 지도자들과 일본농민들이 처형과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농민봉기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이 최시형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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