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의 균열과 김옥균과 민영익의 갈등

2023. 1. 14. 18: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728x90

김옥균

1884년 우정국 설립을 축하하는 자리에 고위관리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개화당이 국왕과 왕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韓圭稷)·윤태준·이조연(李祖淵) 등과 민씨 수구파 거물인 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으며 개화당이 배신자 유재현도 처단하였습니다. 당시 개화당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김옥균의 개화당이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살아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민영익입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의 김옥균과 그가 이끄는 세력의 칼에 맞은 민영익, 그런데 이들은 한 때 뜻을 같이 하던 동지였습니다. 김옥균과 민영익은 조선 후기에 나라의 문을 열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정치 세력인 개화파였으나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김옥균은 1851년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숙부인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한양으로 올라왔습니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김옥균은 스물 두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관직을 밟아나갔습니다. 그리고 1870년대 후반 김옥균은 당시 우의정이던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더불어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이 당시 박규수에게 개화사상을 듣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옥균은 개화파를 이끄는 리더였습니다. 그리고 1877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이가 바로 민영익이었고 김옥균은 아홉 살이나 아래인 민영익을 개화파로 끌어들였습니다. 민영익은 가난한 양반의 아들이었으나 명성황후의 양오빠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아마 김옥균은 이 점에 관심이 생겨 민영익에게 손을 내민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실권자 중 하나는 명성황후였고 김옥균은 자신이 추구하는 개화사상과 명성황후의 권력과의 매치를 그려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의식해서 김옥균이 민영익을 개화파로 받아들였다는 사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아꼈던 민영익이었기에 과거에 급제한 후에 초고속도로 진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십대 초반에는 민씨정권의 최고 실권자로 급부상했습니다. 이에 더해 민영익은 빙사의 정사 및 전권대신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습니다.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어땠을까. 1876년 강화도조약를 시작으로 일본을 비롯한 여러 서양나라에게 문을 열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선도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구식군인들에 대한 차별대우에 반발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김옥균과 민영익은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을 통해 일본인 교관이 죽었는데 이에 대해 사죄할 겸 김옥균 입장에서는 일본의 개화사상가를 만나 그들에게 의견을 구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의 일본방문이 김옥균이 어떤 울림을 주었을까. 김옥균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서 급진적인 개화방법을 택했습니다. 봉건적인 신분제 질서를 타파하고 고른 인재 등용, 더불어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장과 학교를 세우고 서양과학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김옥균이 생각하는 조선에게는 국제화의 발을 맞추기 위해 많은 숙제를 안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빠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국정은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민씨 세력이 개화파의 급진적인 개혁을 막아선 것입니다.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민씨 세력은 청나라 방식처럼 온건한 방법으로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바로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대립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옥균의 개화방법에는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그 자금을 빌리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온건개화파의 방해로 목적으로 이루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돈을 빌리지 못한 일로 김옥균은 많은 비판을 받았고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사이에 틈은 더욱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급진개화파에게는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개화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고 자칫하면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급진개화파는 정권을 잡아야 했고 그러한 방법은 바로 정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변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임오군란 때 건너온 청나라의 군대가 아직 주둔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변을 일으킨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민씨 세력을 지키는 세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884년 봄,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 절반을 이 전쟁에 투입시켜야 했습니다. 김옥균은 이 때를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공사는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일으킬 경우 청나라의 개입을 막아주겠다는 약속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급진개화파는 우정국 건물이 완공되는 날을 거사일로 잡고 이 날에 제거해야 할 명단도 제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명단에는 한 때 함께 했던 민영익도 포함되었습니다. 그가 민씨정권을 비호하는 세력의 실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정국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낙성식이 열리던 때 불길이 치솟아올랐습니다.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민영익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재필 휘하 사관생도들은 경우궁 뒤로 이동시키고 일본공사관에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급진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은 우정국에서 난리가 났음을 고종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경우궁 외곽을 에워쌌으며 김옥균 등은 왕명으로 윤태준, 조영하 등 수구파들을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서 개화파는 새정부의 출범을 알렸습니다. 김옥균은 호조참판을,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재필은 병조참판을 맡으며 주요요직을 장악했고 삼일 째 되었을 때 ‘14개조 혁신 정강’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내용에는 청에 끌려간 흥선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고르게 인재를 등용할 것, 지조법을 개혁하여 국가제정을 풍족하게 할 것,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을 없앨 것, 신분차별을 없앴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바로 청군의 개입이었습니다.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쳤고 이에 대해 준비가 미흡했던 일본군은 한 발 물러섰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수구파와 합세하여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에 진입하였고 일본군은 철수하였습니다. 개화파가 지휘하는 군대가 있었으나 곧 격파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인천을 통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우리가 알고 있는 갑신정변의 3일천하입니다. 
그럼 칼에 맞은 민영익은 어떻게 되었을까. 민영익이 칼에 찔려 어의들이 달려왔으나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묄렌도르프는 미국공사관 소속의 선교사 겸 의사 알렌을 불렀습니다. 알렌은 1881년 웨즐리언 대학 신학과,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에서 의료선교사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송되었으며 서울에 온 것은 1884년 9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공사관 무급의사로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알렌은 지혈과 봉합수술로 민영익을 살려냈습니다. 이에 명성황후는 기뻐하며 알렌에게 지금 돈 50억에 해당하는 10만냥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민영익을 살린 계기로 알렌은 고종의 어의가 되고 알렌은 이를 계기로 고종에게 근대식병원설립을 제안하였고 그에 따라 광혜원이 세워졌습니다. 

김옥균의 사체는 4월12일 인천항에 도착, 이틀 후 서울 마포의 양화진백사장에서 능지처참됐다. ‘대역부도옥균’이란 글씨는 암살범 홍종우가 썼다.

그리고 졸지에 외세를 끌어들여 급진개화를 꿈꾸던 김옥균은 일본으로 건너가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조선을 혼란에 빠뜨린 죄로 그 가족들이 피해들이 보았는데 어머니와 누이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부인과 딸은 노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고종이 보낸 이일직의 습격을 피한 김옥균은 1894년 이일직의 사주를 받고 개화파로 위장한 홍종우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되었습니다. 한 때 같은 꿈을 꾸던 민영익과 김옥균, 그들의 대립은 한국근대사 역사에 아픈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