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없었던 헤이그 특사의 외교 노력

2022. 11. 2. 20:4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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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한국대신들을 압박합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을사조약 혹은 제 2차 한일협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정당한  조약이 아니었습니다. 1930년 1월 1일부터 3일까지 동아일보에 ‘한말 정객의 회고담’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참정대신 한규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모든 대신들이 이 조약 체결에 대해 반대한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체결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그 중 이완용이 ‘거절만 한다고 일이 해결될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고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과 내부대신 이지용도 찬성하는 의견을 밝혀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을사늑약의 프랑스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가 1906년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란 논문에서 협상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은 물론, 조약체결 비준서 등이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한글과 일본어로 된 조약문의 첫머리에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는 등 을사늑약을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는 미국 컬럽비아대 귀중본도서관에서 고종이 호머 B 헐버트를 통해 9개국 국가원수들에게 을사늑약이 원천 무효임을 알린 영문친문서도 발견되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이준열사에게 수여한 헤이그 특사 위임장 (1907년 4월 20일)

이렇게 을사늑약이 맺어져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때에 고종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세계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제의 침략적인 행동과 불법적인 일들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을사늑약 자체가 고종의 재가가 없었고 위임을 받지 못한 대신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결된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외교권은 일본에 넘어가 있었고 따라서 고종은 이들 특사를 비밀리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이는 이준으로 이 사람은 검사출신이었습니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은 만났는데 이상설은 1905년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고 을사늑약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으로 그 부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적임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위종은 이들의 통역을 맡은 바 이들 3명은 고종의 친서를 들고 러시아 황제를 만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회의를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난 뒤였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행사한다는 이유로 이들의 참석을 불허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 것은 아니었습니다. 회의장 밖에서 각국 대표들을 일일이 만나가며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열강들에게 도움을 호소한 것입니다. 헤이그 특사 3인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에 언론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윌리엄 스테드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스테드는 유럽 최초로 인터뷰 방식을 도입했고 19세기 저널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됐을 뿐 아니라 1901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이였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스테드는 헤이그 특사 3인을 취재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 평화회의보>에 이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150명 이상의 각국 기자들 앞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습니다. 이것은 윌리엄 스테드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까지 헤이그 특사에 별 관심이 없던 기자들은 많은 관심들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 자리에서 대한제국을 지지하는 언론인들의 성명이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왜 조선이 이 회담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이는 조약이 처음부터 오염됐기 때문이다."(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소식지 더 쿠리에 드 라 콘페랑세 드 라 파 1907년 6월30일자 1면 이위종 인터뷰)
헤이그 특사 파견이 일본의 방해로 허무하게 끝났다고 하기엔 이상설, 이위종, 이준의 노력은 컸습니다. 그러던 중 이위종이 러시아에 있는 아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자리를 비움으로써 헤이그 특사들에게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통역을 담당한 이위종이 없으니 이들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이위종이 떠난 지 삼일 째 되던 날 특사가 머물던 드용 호텔에서 이준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준씨가 세계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 사람이 다 알거니와, 어제 동경전보에 따르면 그가 충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기사

이준 열사 무덤

이준의 자결소식이 국내언론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백성들이 분해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럼 당시 이들을 바라본 외신들은 어땠을까요. 만국평화회의의 부총재이자 네덜란드 외교과인 드 보토프는 고종의 특사를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특사를 바라보는 눈은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는 일기에서 ‘일본이 조선과 만주 모두를 지배할 때 모두 좋은 일이라고 일기에 기록했으며 일본이 앞으로 동인도 제도에 눈길을 돌릴 것이기 때문에 일본과 최대한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영국의 더 데일리뉴스는 헤이그 특사파견을 취재하면서 조선황제를 을사조약을 위반한 것으로 보고 조선황제에게 관대한 대우를 해서는 안된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이후 헤이그 특사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대한제국 침략에 가속페달을 밟았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대신들은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 7월 19일에 고종은 순종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양위조칙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7월 24일 한일신협약 혹은 정미 7조약이 맺어졌으며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이, 29일에는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1일에는 군대해산령이 떨어지며 대한제국의 힘을 점점 잃어갔습니다. 
  이후 이위종은 조국의 독립에 러시아의 힘이 필요하다고 보고 블라디미르 사관학교에 입학, 러시아 장교로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이후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한 이위종은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으나 이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상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1917년 순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준 열사의 죽음 원인은 대한매일신보가 전한 것처럼 자결이 아닌 얼굴에 난 단독 때문이라고 일본문서에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문사진에는 그의 단독 증세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설령 단독에 걸렸다 한들 지병에 있지 않는 한 급작스럽게 죽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일기도 했습니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는 말처럼 평화를 위한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한국침략을 묵인한 열강들이 전쟁법규를 심의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애초부터 헤이그 특사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우리의 임무가 실패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에 동의했거나 독립을 포기한 사실이 결코 없음을 헤이그 회담 뿐 아니라 유럽의 모든 정부와 미국에 알리기 위해 황제의 밀사로 임명됐다." 
헤이그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이위종은 로이터 통신과 이렇게 인터뷰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헤이그 특사는 일제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조선조정과 대신들의 의지가 담긴 표면적인 사건으로 우리들 역시 이 사건을 실패라고 기억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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