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만남,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2023. 1. 28. 19:1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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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조선은 여러 가지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 및 유럽의 열강들이 조선 해안으로 와 통상을 외치며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며 부패했고 그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습니다. 내외적인 혼란에 따라 봉기가 잇따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왕은 고종,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흥선대원군에게 있었습니다. 왕이 아닌 흥선대원군이 어떻게 조선 최고의 실권자가 될 수 있었을까.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조선은 정치적으로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세도정치란 특히 19세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로 안동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가 닫시 권력가문으로써 권세를 누렸고 왕권은 힘을 잃어갔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삼정(三政: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심해 철종 대에는 삼정이정청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자 최제우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제창하며 창시한 동학(東學)이 백성들에게 평등과 존중 사상을 전파하였습니다. 반면 당시 왕족들이 살얼음판을 걷는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권세가들은 눈에 가싯같은 왕족들, 달리 말하면 남다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것 같은 왕족들을 제거했기 때문이고 이에 이하응은 살아남기 위해 장안의 건달들과 어울려다니면서 안동 김씨 가문에 구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하응은 살아남기 위해 마치 정치에 권력이 없는 사람인 양 행동한 것입니다. 당시 왕은 철종이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왕대비 조씨에게 현재 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만약 철종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하응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시에는 왕에 대한 지명권을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철종이 죽고 나서 이하응의 둘째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종에게는 형인 이재면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둘째인 재황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고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누군가가 수렴청정하겠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최고어른인 신정왕후는 그 수렴청정을 흥선대원군에게 맡깁니다.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는 데에는 흥선대원군이 최고 적임자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대원군의 자격으로 최고 권력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이란 왕이 되지 못한 왕이 아버지를 뜻하는 말로 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선조의 부친 덕흥대원군과 인조의 부친 정원대원군, 철종의 부친 전계 대원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망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며 고종이 어른이 되어가는 10여 년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신정왕후의 바람대로 안동김씨 가문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에 주력합니다. 60년 안동 김씨 세력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으며 삼군부를 설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안동 김씨의 좌장 영의정 김좌근을 해임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시켰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서원도 대폭 정리하였는데 이는 서원을 당쟁의 온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호포법을 실시, 군포를양인 뿐만 아니라 양반에게도 부담시켰으며 고리대로 변질된 환곡제를 일부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중간 과정에서 탐관오리와 토호의 수탈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정치행보는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항상 지지만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전 왕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사업을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경복궁 중건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통해 왕의 권위를 올리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징수했고 원납전 1만 냥을 내면 평민에게 벼슬을 주고 10만 냥을 주면 수령을 시켜주었다고 하니 그에 따른 폐해가 따랐습니다. 또한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의 폭등을 야기했으며 1결당 1두씩 특별세를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경복궁 중건 사업에 백성들이 노역으로 동원되었으니 그 불만이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성들의 노고로 현재의 경복궁이 완성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그에 대한 비판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서양세력이 조선을 위협하던 시기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어 외양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는 오히려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서구문물의 도입을 늦춰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고종의 초기 10년 동안 최고의 권력실세로 자리잡은 흥선대원군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택된 사람은 바로 명성황후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선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명성황후에게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일찍 죽어서 외척들이 힘쓸 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집안이 한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명성 왕후의 여흥 민씨 가문은 태종의 왕비이자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 왕후, 숙종의 왕비인 인현 왕후를 배출해낸 명문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며느리 간택은 최악의 선택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의 사이가 너무 안좋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며느리가 된 명성왕후는 삼촌과 사촌오빠를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어른이 되어 친정할 수 있게 되자 최익현이 상소를 올립니다.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글을 담은 상소문에는 서원철폐와 경복궁 중건의 폐해를 담아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명성황후가 적극 지지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명성왕후가 기획하여 최익현이 상소문을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로 인해 정치권력은 고종에게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고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조선의 최고 실권은 명성왕후가 쥐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난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은 나라를 망친 원흉을 명성왕후와 민씨 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당시 신변의 위험을 느낀 명성왕후는 궁궐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고 ‘왕비 민씨가 죽었다.’고 선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성왕후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게 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몰려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심해졌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급진개화파들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이 때 명성황후는 청나라도 도움을 요청했고 삼일천하로 끝난 이사건으로 인해 명성황후는 계속 조선 최고의 실권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권력을 유지한 것은 실수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 이를 낫게 하기 위해 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리며 왕실 재산을 탕진했고 민씨 세력은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따라서 지방수령들의 수탈을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1894년에는 조선 후반 최대의 농민봉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역시나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 때 일본은 갑신정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맺은 톈진 조약을 들먹이며 군대를 보냈습니다. 여기세 승리는 일본이 가져갔으나 명성왕후는 다시 러시아를 끌어들여 러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일본은 명성왕후를 침략하는 데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의 대립은 조선이 망국의 길로 가는 비극적인 역사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이 이렇게 대립한 데에는 흥선대원군이 고종이 사랑한 궁녀가 아들이 낳자 그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나 흥선대원군이 보내준 약을 먹고 명성왕후의 자식이 사망하자 사이가 안좋아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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