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제국 고종 황제 어새

2022. 11. 3. 20:4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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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어새

1897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대립으로 인해 조선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제국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대우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인해 명성황후를 잃었고 러시아와 일본, 중국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 상황이 나아 질리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은 한반도상황에 대해 우위를 가져갔고 1905년에는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갔으니 이를 을사조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국새 인장도 없이 강제로 맺었기 때문에 을사늑약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이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등의 국가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냈으며 그 때 고종황제의 어새를 찍어서 보냅니다. 
국새는 왕이 명령을 내릴 때나 외교 문서 등 국가의 중요문서에 찍는 도장으로 국왕이 입증한다는 싸인과도 같은 것입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 어새도 국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새의 역사는 상당히 깊습니다. 우리나라 국새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데 북명(지금의 강릉)의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濊王印)'을 주워 임금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습니다. 고구려에서도 165년 7대 차대왕이 시해되자 신하들이 왕의 아들을 놔두고 동생(신대왕)에게 국새를 바쳤다고 전해지니 삼국시대부터 이미 국새는 존재하였습니다. 고려에서도 외교활동에 따라 요, 금, 원, 명에 책봉과 함께 인장을 받았고 이 인새가 일종의 국새인 셈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명나라에 국새를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니 9년 뒤에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판 금인장을 받아온 것입니다. 명나라는 인장의 재료로 옥을 더 높게 쳤고 제후국이라고 생각한 조선에게는 금인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갑오경장 대 제후국 시대의 국새가 모두 폐기되고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에 걸맞는 국새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국새는 조선 창건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40여개가 만들어졌으며 이중 상당수 일본이 가져갔거나 도로 되찾아왔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분실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새와 어보 가운데  고종황제 어새는 대한제국 시기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어새로 2008년 12월에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국립고궁박물관은 국외로 반출된 우리문화재를 고국으로 되돌리기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재미교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고종의 어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감정결과 이 어새는 진짜로 밝혀졌고 이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사적인 친서에 사용한 고종황제 어새는 전체 높이 4.8cm. 무게가 794g으로 손잡이는 거북이 모양이고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려있습니다. 정사각형의 인장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고 양각되어 있으며 그와 같이 발견된 내함은 황동재질 2단, 하단에는 인주를 넣고 그 윗단에 국새를 넣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거북형의 손잡이는 은과 금의 비율이 81대 18, 몸체는 57대 41의 비율로 제작되었으며 따라서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皇자는 본래 白 아래에 王을 두어야 하지만 이 어새에는 自밑에 王을 새겼습니다. 당시 제작된 고종 친필의 비석과 어보, 의궤 등에서 모두 이런 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이 어려움에 처하던 시기에 이 황제 어새를 사용하였습니다. 주변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몸에 지니고 있다가 사용한 어새였습니다. 이 어새는 대한국새나 황제지보처럼 문서가 아닌 친서에 주로 사용된 점을 미루어 비밀리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직접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사용한 의례용 어보나 실무용 국새는 3.4kg이라고 하니 몸에 지니고 다니기 힘들었을 것이고 크기에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보는 은과 구리가 주성분입니다. 반면 국새는 은과 금으로 제작되어 고종 입장에서 이 국새를 무척 아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국새는 비밀리에 제작되어 고종의 중요한 문서에 사용된 것입니다.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고종황제 국새의 보면(寶面·도장을 찍는 면)과 이 국새가 날인된 고종의 친서. 이 친서는 1906년 1월 독일 황제에게 보낸 것이다. 국새에는 ‘皇’자를 ‘王’자 위에 ‘白’자를 둔 것이 아니라 가로획이 하나 더 있는 ‘自’자를 쓴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 한 나라의 황제로서 나라의 도장이라고 할 수 있는 어새를 휴대용으로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06년 1월에 독일 황제에 고종은 친서를 보내며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줄 우의를 기대한다.“라고 적어보내며 이 비밀도장인 황제어새를 찍어보냅니다. 역시 이탈리아와 프랑스황제에게도 이것을 사용하였습니다. 황제이지만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그는 필사적으로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 어새는 그러한 노력의 표징이었습니다.고종황제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그 다음 후한으로 이어진 것에 영감을 얻어 후한을 연 광무제의 연호를 빌려 광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국새, 어새, 어보, 보인 등을 모두 새로이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품들은 『보인부신총수』라는 책에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새에 대한 기록은 이 책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은 여전히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 풍전등화와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새가 다른 어새들이 비해 크기가 작은 것도 그러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밀리에 사용되기 위함이며 여기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바로 어새를 보관하는 함에 인주가 같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종은 국제정세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당해내지 못한 왕으로 기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1899년 고종황제는 서양의 기술력을 들여와 전차를 완성시켰으니 이는 일본보다 3년이 빠른 것이었습니다. 1902년에 와서 8개월 동안 서울에 머무른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는 “서울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전차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그 전차들이 서울 근교의 성곽 밖에 이르기까지 주요 간선도로를 통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전차로 말미암아 서울은 근대적 교통시설을 갖춘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처럼 고종의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관심이 많은 군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별입시를 운영하여 그들에게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내탕금 일부가 사용처가 불분명한 것이 있어 학자들이 이것이 독립자금으로 쓰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로 보내니 이들이 바로 헤이그특사입니다. 하지만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조국의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고종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럼 어새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어새란 황제가 사용하는 것이기에 순종에게 물려주는 것이 맞지만 고종은 그 뒤로 2차례 정도 이 어새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당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궁궐을 나오면서 이 어새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고종이 헐버트에게 친서를 보내면서 이 어새를 찍은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1909년 1월에 보낸 문서는 원본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제어새의 날인과 동일하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고종은 헐버트에게 독일 디스콘토 게젤샤프트은행에서 비자금을 찾아오라며 자신의 어새를 사용한 문서를 건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문서는 사본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어새의 진위여부는 확인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1914년 고종이 독일황제에게 보낸 친서에는 국새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적이라면 바로 일본입니다. 고종은 한일병합때까지 황제어새를 가지고 있다가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어새는 100년의 세월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국의 품에 안긴 고종황제 어새는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어떡해서든 세우려고 했던 고종의 노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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