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종의 돈 그리고 헐버트
2023. 3. 17. 09:4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728x90
1895년 조선은 을미사변을 겪었고 다음 해 2월에는 아관파천이 있었습니다. 암울한 조선의 현실, 이후 고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서 조선은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중국과 대등한 자격을 갖춘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알린 것입니다. 그리고 고종은 그동안 조선의 왕들이 입던 붉은 색 곤룡포 대신 황색의 곤룡포를 입습니다. 그러면서 고종 스스로도 과인이라 부르지 않고 짐이라 부릅니다. 고종 스스로 국격을 상승시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구본신참에 입각하여 광무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황제즉위식을 거행합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형의 공간으로 조선은 토지신과 곡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종은 환구단을 설치하고 여기에서 제사를 지냄으로써 제후국이 아닌 황제국의 위상을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니 이것은 삼한의 옛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광무개혁, 이 때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 9개 조항을 발표하였고 해군의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면권, 조약 체결권 등 주요 권한을 모두 황제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그리고 탁지부에서 관리하던 재정을 황제 직속 궁내부 내장원에서 관리하게 하였으며 미국인 측량사를 고용하여 근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이를 토대로 토지소유증서인 지계를 발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식산흥업이라 하여 상공업진흥정책도 벌였는데 이를 통해 예학교, 상공학교, 외국어학교 등이 설립되고 황실 스스로 방직, 제지, 유리 공장 등을 설립해 산업 발전의 기반을 조성되었습니다. 적어도 이 시기의 대한제국은 스스로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개혁으로 인해 황제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화되었고 하향식개혁이다 보니 다른 지식인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시기에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근대화로 나아가던 시기였습니다. 1899년에는 전차가 서울에 놓여졌고 궁에 전기도 도입되었습니다. 건청궁의 전등소는 궁중 전기등 점등계획에 따라 조선정부가 1884년 9월 4일 미국 에디슨전등회사에 발전설비와 전등기기를 발주해 1887년(고종 24년) 초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발전소(發電所)였으며 1898년 1월 18일 본격적인 전기사업을 위해 한성전기주식회사(漢城電氣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이듬해 4월 10일 종로에 거리조명용 첫 민간전등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러던 1904년 뤼순 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이 기습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루 뒤에 인천 앞바다에 잇던 러시아 군함도 일본군함의 공격을 받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이루어진 러일전쟁, 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고종뿐만 아니라 전세계도 러시아의 압승을 예상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을 며칠 만에 이기느냐를 두고 내기를 벌일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는 일본의 육군보다 5배나 많았고 발틱함대를 보유한 러시아의 해상전력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인종주의적 시각까지 더해져 당연히 서양국가이던 러시아의 승리가 점쳐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 이후에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감독권을 인정한다는 조항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이를 중재한 것은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은 본격 가속화되었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까지 체결되었습니다.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까지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 일로 인해 고종은 강제퇴위당해야 했습니다.
‘조령을 내리기를, “이상설, 이위종, 이준의 무리들은 어떤 흉악한 성품을 부여받았으며 어떤 음모를 품었기에 몰래 해외에 달려가 거짓으로 밀사라고 칭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킴으로써 나라의 외교를 망치게 하였는가? 그들의 소행을 궁구하면 중형에 합치되니 법부에서 법률대로 엄히 처결하라.”하였다.’ 『순종실록』
그러던 1909년 한 미국인이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그는 헐버트, 그는 고종으로부터 상해에 있는 덕화은행에서 자신의 비자금을 찾아달라는 것입니다. 덕화은행은 중국에 있는 독일계 은행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감시가 철저했던 때라 조선황실은 자금이 부족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돈을 왜 찾으려고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 독립자금으로 활용하려고 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비자금이니만큼 그 의도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금액은 얼마나 될까. 현재 가치로 500억 원이 넘는 큰 돈, 그런데 그 돈을 이미 누가 찾아갔다는 이유로 지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통감부는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비자금을 수사하게 되었고 여러 은행에 예치된 돈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덕화은행에 예치된 돈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종이 덕화은행에 돈을 예치하면서 독일총영사에게 고종 자신의 동의 없이는 절대 돈을 내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덕화은행에 있던 500여 억원이라는 돈 외에도 로청은행에 현상건 명의로 예금된 자금이 30만 엔, 고종의 측근인 이용익 명의로 일본 제일은행에 맡겨진 것도 20만 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황실에 금괴도 많았다고 알려졌습니다.
“내탕금을 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겠소. 내가 고종 황제의 수임권자로서 돈을 받게 되면 즉시 그 돈을 한국에 돌려줄 것이니 알아서 처분하시오.”(1948년 12월 22일, 호머 헐버트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일부)
그럼 여기서 내탕금이란 무엇일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개인자금이 있었을 것으로 보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이성계의 재산은 함경도 일대 땅의 3분의 1정도를 가지고 있었고 집에 딸린 노비만 하더라도 수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신하 정도전이 이성계의 막대한 재산을 국가 재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는 이방원에게 제거당했고 이를 기점으로 왕과 왕실의 재산은 국가 재정과 구별되어 내탕금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궁궐의 내시들로 이루어진 내수사라는 기관에서 내탕금을 관리하였습니다. 이러한 내탕금은 국가재정과 달리 회계 감독을 받지 않았고 따로 사용처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왕의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탕금은 공을 세운 신하에게 격려금 혹은 왕자, 공주의 결혼비용으로 사용되었고 긍정적으로 흉년이 들거나 천재지변이 났을 때 구호자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절을 지을 때 이 돈을 사용하였습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내수사를 내장원으로 승격시키고 국가재정으로 관리하던 땅과 인삼 전매 사업, 철도 광산 등을 내장원이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럼 덕화은행에 들어간 고종의 돈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학자들은 1908년 일제 통감부가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가짜 서류를 만들어 덕화은행에서 고종의 내탕금을 인출해 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고종이 이 돈으로 독립운동하려고 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를 고용해 통감부 초대 외무총장 나베시마가 쓴 인출금 영수증을 확인하고 관련 서류들을 모아 진술서를 만든 다음 미국 의회에 제출하는 등 돈을 돌려받으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헐버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886년에 세워진 한국최초의 근대시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조선정부의 초청으로 영어교사로 파견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한글을 빠르게 습득하여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수 있게 되었고 1891년에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헐버트는 "사민필지" 서문에서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소리글자인데, 조선의 지배층이 한자만을 고집하고 한글을 업신여긴다.”고 기록을 하면서,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구한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미양요와 어재연장군의 수자기 (1) | 2023.04.18 |
---|---|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과 미국에겐 거중조정이란. (0) | 2023.03.18 |
고종 뒤의 권력자 명성왕후 (1) | 2023.03.16 |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왜 사이가 좋지 못했나. (2) | 2023.03.14 |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만남,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0) | 2023.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