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크리스마스

2023. 5. 29. 14:5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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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크리스마스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선시대하면 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간적으로 보면 1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땅에는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선 후기에에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으니 조선 시대 크리스마스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실재했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요다음 토요일은 세계 만국이 이날을 일 년 중에 제일가는 명절로 여기며 모든 일을 멈추고 온종일 쉰다고 하니 우리 신문도 그날은 출근 아니할 터이요. 이십팔 일에 다시 출판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 「독립신문」, 1897년 12월23일,
이러한 크리스마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84년 개신교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1887년에 언더우드는 세례를 베푼 한국인들을 성탄절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처음으로 성례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 땅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누린 첫 크리스마스였을 것입니다. 이후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명성황후 조카 민영익을 살린 선교사 겸 의사 호러스 알렌이 기념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1896년 12월 24일자 신문에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하여 성탄에 대한 소개기사를 처음 실었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기념일은 아니고 국내 선교사의 부인들이 서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고받는 정도였는데요. 아펜젤러 선교사도 아이들을 모아 성탄절에 대해 전했고 그러면서 양말에 선물을 담아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당시 소년들은 산타클로스가 준 선물로 알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스크랜턴 선교사도 이화학당 소녀들을 위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고 아펜젤러는 한국의 첫 산타클로스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선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보낸 후에  교회를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되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이 땅에 세워진 것은 1894년의 일이었습니다. 앞서 국내 언론지에서 성탄 축하 언급보다는 2년 정도 빠른 시기였습니다. 당시 고종황제의 왕비 명성황후는 성탄절에 대해 궁금해 했고 홀튼 선교사는 매번 가마를 보내 궁정으로 초대하는 황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소나무와 촛불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궁에 설치하며 크리스마스를 선물했습니다.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종황제가 이 트리에 지나친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어두워져 트리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것에 문제였습니다. 그리하여 임시로나마 주변을 어둡게 할 가리개 따위가 없어 트리를 장식한 촛불이 언더우드 부인의 기대처럼 아름답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언더우드 부인은 이를 두고 ‘정말 짜증이 났다, 효과가 아주 엉망이 되고 말았다.’며 기록해 두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석판과 종이 껍질이 입혀진 석필을 주었고… 여성들이 선물 봉지를 나누어주는데 거기에는 땅콩, 일본 사탕 일본 과자 두 개, 오렌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왕길지 목사의 선교 발자취』, 1900년 성탄절 풍경
‘남녀 소학교 학도들을 위하여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나뭇가지마다 과자 봉지를 걸고 예배를 본 후에 차례대로 나와 선물을 받아갔다.’ 「예수교신보」, 1907년 12월 25일
1899년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는 "(크리스마스 날) 근처 여러 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 없이 구경하여 회당문이 다 상하도록 들어오는" 광경이 적혀있으며,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이 쓴 책 『상투의 나라』에는 "크리스마스 전날, 왕비(명성황후)는 우리의 성대한 축제와 그 기원, 의미, 그리고 어떻게 거행하는지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우리나라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축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교회에서 ‘성탄극’같은 행사도 열었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이 날에도 구경꾼이 되어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1934년 조선일보는 기사에 "조선서도 이날을 전후하여 거리에는 크리스마스의 장식이 있고 또 어린이를 중심으로 혹은 어른들 사이에 프레센트가 교환된다."고 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미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80년 전 조선의 연말에도 쇼핑을 하고 술자리를 가지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였다.1930년 명동.


‘모든 도시와 골짜기의 기독교회와 더불어 크리스마스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조차 일년 중 가장 잘 알려진 날이 되었다. (…)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은 한국적인 것이고 서구에서 즐기는 크리스마스에는 낯선 특징이 있다. (…)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기독교회는 비 기독교인 공동체에 영향을 끼친다.’ 『The Korea Mission Field』, 1935년.
당시 사람들은 독특한 성탄절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배재학당의 학생들은 수십일 전부터 만들고 준비한 수백 개의 등불을 회당 앞에 걸어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십자등에 ‘우리나라에 복음의 빛이 비쳤다’라는 글을 적었습니다. 우리는 고대부터 연등을 달아두었던 풍속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러한 풍경이 만들어졌으며 당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캐롤을 농악처럼 연주하기도 하고 태극기도 장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동지(冬至)가 한 해를 정리하는 날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 위상이 뒤바뀐 것인데요. 이러한 것에 크게 기여한 것은 바로 고종이 역법을 태양력으로 개편하면서 사람들이 음력으로 기억해오던 삼월삼짇날, 칠월칠석날의 세시풍속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 신정(新正), 구정(舊正)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말연시의 세시풍속이 한국 사회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1928년에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하여 모금을 전개하였으며 4년 뒤인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 씰이 이 땅에 등장하였습니다. 캐나다 선교사인 셔우드 홀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결핵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결핵퇴치기금을 모으기 위해 사업을 추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크리스마스 씰은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총 9차례에 걸쳐 발행되었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셔우드 홀이 일제 총독부에 의해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쓰고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거북선, 금강산 등을 배경으로 쓰인다는 것이 탄압의 이유였는데 거북선의 포가 결핵마크에 조준하여 결핵을 무찌른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저항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남대문으로 교체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의 분위기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여성들이 관심을 갖는 건 크리스마스가 쇼핑을 위한 또 하나의 핑계거리이자 기회라는 사실이다.’ -「『윤치호 일기』, 1933년, 12월 24일
1926년에는 ‘사의 찬미’를 발표한 가수 윤심덕이 그 해 겨울에 우리나라 최초의 캐럴송인 ‘싼타크로쓰’를 발표합니다. 그러던 1933년 잡지 「신여성」에 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것은 ’크리스마스 푸레센트‘라는 제목으로 추천 선물 리스트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보이(Boy)에게‘, ‘걸(Girl)에게’라고 하면서 성별에 따라 어떤 선물이 좋을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여자가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안 보내도 조타고 하였습니다만 은 남녀동권을 주장하시는 분이시면 먼저 크리스마스푸레센트부터’라고 제안하였습니다. 1936년에는 「매일신보」에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간 크리스마스’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는 당시 크리스마스가 종교적 축일에서 연인들간의 상업적 파티로 변해갔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 총독부는 우리나라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에 하는 행사를 금지하였고 이 기간에 일본군에 위문품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크리스마스는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이후 쭉 이어졌습니다. 한편 독재가 횡행하던 대한민국 현대사에 야간통행금지 기간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만큼은 올나잇이 허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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