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근대화의 상징 전차
2023. 6. 30. 17:2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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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후반,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많은 물건과 교통통신수단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전차입니다. 전차는 도로 등에 설치한 두 줄의 레일을 따라 궤도차량을 움직여 사람 이나 화물을 운송하는 궤도시설인데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운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됐고, 도시에 사는 인구를 실어 나를 대중교통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철도 마차입니다. 철도 선로 위를 움직이는 차량을 말이 끄는 것인데, 1836년에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확산했습니다. 하지만 철도 마차는 심각한 위생 문제가 있었습니다. 선로 주변에 말의 배설물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말을 다른 동력원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집니다.. 얼마 가지 않아 철도 마차는 폐지되고 대신에 노면 증기차가 등장했는데, 노면 증기차도 곧 노면 전차로 대체됐습니다.
이러한 근대적인 교통수단은 1876년(고종 13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한 김기수가 귀국하여 임금에게 보고한 복명별단(復命別單)과 1877년 펴낸 견문록 『일동기유』에 1872년 최초 개통된 일본철도를 이용해본 경험을 소개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졌습니다. 1880년 2차 일본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의 복명서에 철도의 중요성 역설되었습니다. 1882년 청국 이홍장 추천으로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외무협판(차관급)으로 임명되었던 전 청국주재 독일 영사관 묄렌도르프(穆麟德) 사망 후, 그의 아내가 남편 생전의 일기와 편지를 정리하여 펴낸 『묄렌도르프의 수기』의 “1882년 묄렌도르프가 조선으로 간 직후, 철도 부설을 신청한 영국과 일본 회사의 자본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자문 요구에 정부의 자금이 없으니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였으며, 이 문제는 1885년에도 제기되었지만 같은 이유로 미뤄졌다.”는 기록에서 고종 또한 1882년 철도 부설을 검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98년 경인철도 건설에 참여 중인 미국인 H. Collbran과 H, R, Bostwick이 고종황제에게 홍릉(명성황후 능)을 찾을 때마다 가마와 신하들을 대동하는 불편을 편리한 전차 도입으로 경비 절감까지 하면서 해소하자는 건의에 동의하고, 공동으로 투자까지 하여, 1899년 5월 17일 서대문~홍릉 간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를 개통케 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차 노선이 서대문에서 청량리로 결정된 것은 고종이 이 청량리 홍릉(洪陵)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894년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운행한 일본에 이어 1899년 음력 4월 초파일(양력 5월 17일)에 전차개통식이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전차의 등장에 환호하였지만, 그 과정에는 불상사도 없지 않았습니다. 개통 직전의 1월에는 약 12m의 송전선 절도사건이 일어나자 그 범인으로 지목된 두 사람이 재판도 없이 참형을 받은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동대문에서 서대문(돈의문)까지 개통된 전차는 서울을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날 전차를 본 서양인 중에서도 놀라는 표정을 지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차가 세계 최초로 실용화된 때는 1881년이니 서울의 전차는 세계에서도 이른 시기에 놓인 셈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선 일본 교토와 나고야에 이어 세 번째 전차였습니다. 개통당시 전차는 상등칸과 하등칸으로 구별하고 요금은 구간제로 받았습니다. 상등칸은 전차 중간에 6명만 탈 수 있는 칸으로 창문과 문을 달아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하등칸은 창문 없이 지붕만 덮여 있는 개방형으로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하고 차가운 바람도 그대로 맞아야 했습니다. 가장 긴 구간인 돈의문 부근 경교에서 청량리까지 상등칸은 엽전 7전 5푼, 하등칸은 5돈의 요금을 받았습니다. 당시 쌀 1되의 가격이 하등칸의 요금에 달할 정도로 그 이용료는 비싼 편이었습니다. 요금은 비쌌지만 사람들에게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전차는 연일 꽉 찼으며 생업도 제쳐두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타면 종점과 기점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차를 타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기도 했으며 이 전차를 타기 위해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새로운 이동수단인 전차의 노선을 따라 서양 음식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차 개통 직후인 1899년 8월, 서양 요리와 함께 커피와 코코아를 제공하는 음식점이 홍릉 앞에 세워졌으며 『독립신문』에 해당 가게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개통 1주일 뒤에는 탑골공원 앞에서 5살짜리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죽자 성난 군중이 전차 두대를 불태운 일도 있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으로 일본인 운전수들은 호신용 권총의 휴대와 순경의 동승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한 유족보상 등을 걸고 파업 끝에 귀국해버렸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전차이용승객은 급속히 늘어나, 전차 노선은 같은 해에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졌고, 1900년 1월에는 구용산(지금의 원효로 4가)까지 다시 연장되었습니다. 1901년 7월에는 전차 노선은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의주로에도 가설되었으나 예상과 달리 이 노선만은 별로 사용되지 않아 몇 년 뒤 폐지하였습니다.
1909년 일제가 전차의 경영권을 인수한 뒤로 서울의 새 전차 노선은 일본인의 필요에 의해 놓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숭례문(남대문) 주변 성벽과 돈의문이 전차 노선 때문에 철거되는 비극도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1943년까지 16개 전차 노선이 놓이면서 경성(서울)의 구석구석을 이었습니다. 생활권은 도심에서 교외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전차는 학생과 직장인이 등하교·출퇴근을 하는 데도 꼭 필요한 수단이 되었고 1930년대엔 전차를 타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30분 넘게 기다려야 겨우 탈 수 있었습니다.
광복 후에도 전차는 여전히 정겨운 '시민의 발'이었습니다. 많을 땐 한 해 5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전차를 이용했습니다. 전성기였던 1950~1960년대에는 무려 72개 역에 200여 대 전차가 서울을 누볐습니다. 은방울자매가 부른 1960년대 히트곡 '마포 종점'에 등장하는 '종점'이 바로 전차 종점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가 채 지나기 전 전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급속히 느는 서울 인구에 비해 전차는 속도가 너무나 느렸고, 오히려 교통 정체를 일으키는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시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로 교통 정책을 전환하기로 하고 1968년 11월 29일 전차 운행을 전면 중단했습니다.
그럼 이러한 전차 개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전차로 인해 서울은 근대적인 도시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고종은 근대화를 위해 노력을 해왔고 전차는 그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서울시장직에 해당하는 한성판윤 이채연은 친미개화파로 그는 전차 운행을 위해 우선 시내 도로를 50척으로 넓히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그 후 미국인 사업가들과 협력하여 한성전기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대문에 발전소와 차량기지를 건설하고 선로를 부설하고 차량을 도입하는 등 절차를 차근차근 추진하였는데 바로 현대적인 도시계획을 진행한 것입니다.
전차 도입으로 인해 사람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전차는 누구든지 돈만 내면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차비를 내면 평민도 양반과 같은 차를 탈 수 있었고, 차비를 내지 못하면 양반이라도 탈 수 없었습니다. 여자라고 타지 못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전차의 도입으로 수백년간 자리했던 조선인들의 계급의식을 해체시켜갔습니다. 먼 거리를 짧은 시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전차의 막차시간이 밤 11시까지로 늘어나면서 밤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서울로 인구가 몰리던 시기였고 전차는 1938년 하루 24만 명이 타는 교통수단이 되었습니다. 걸어서 등교하기 운동과 시차출퇴근제까지 도입되었고 그래도 문제해결이 쉽지 않자 19개 정류장중 43개를 통과하는 급행전차까지 도입되었습니다. 집중되는 인구에 도시는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차에 행해진 시책들은 일제강점기 시기 도시확장에 따른 대처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381호 전차와 363호 전차가 남아 박물관에 남아 당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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