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누구일까

2024. 3. 23. 09:2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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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홍종우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주역이면서 개화파 인물입니다. 다만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개혁을 주도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측면이 강하며 항간에서는 친일파가 아니었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용일파’ 즉 일본을 이용해서 조선을 개화하려고 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고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옥균은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급진개화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300만원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고 했지만 차관 교섭 자체가 실패했고 더불어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김옥균은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894년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의 설득에 넘어가 청나라로 건너가서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서양의 침략을 맞서자는 삼화주의를 설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3월 28일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기억할 수 있겠고, 따라서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홍종우는 누구일까.
  경기도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김옥균보다 3살이 어렸습니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홍종우는 19년간 같이 살았던 아내와 열 살 정도 된 어린 딸을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1886년 3월부터 프랑스행을 결심하였는데 일본 메이지 유신의 거물이자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로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추천하였기 때문입니다. 1888년 나가사키와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홍종우는 이어 1890년 12월 파리로 들어갔습니다. 
  홍종우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2년 동안 배 삯을 모았고, 「아사히신문」의 식자공으로 취직해 이곳에서 국제 신문들을 보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홍종우는 일본인들에게 연설을 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로 유학온 홍종우는 거의 2년 동안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자로 활동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그가 번역한 『춘향전』의 프랑스판 제목은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e』)였습니다. 홍종우는 프랑스에 유학 온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뛰어난 지력과 독특한 차림새 등으로 눈길을 끌습니다. 이러한 홍종우에 대해 당시 프랑스 언론들은 여러 번 다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는데 그 중에는 당시 외무부장관인 코고르당과 실주주의의 대표 사상가인 르낭 등이 있었습니다.  홍종우가 프랑스에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은 레가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가미는 홍종우가 기메 박물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으로, 그의 글 「정치적 암살자」는 1894년 프랑스 아시아 문화 전문지 「퉁 빠오」에 실렸습니다. 


 ‘그의 머리는 천정까지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를 보자 나는 일종의 신비로운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 느낌은 예전 동양에서 본 큰 호랑이가 내게 불러 일으켰던 경외감 같은 것이었다.’
  홍종우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레가미는 직접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간직했으며 한동안 같이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레가미는 홍종우가 프랑스에 온 것에 대해 「정치적 암살자」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홍종우는 배우려는 욕구가 아주 강하다. 그는 야망이 아주 강해서 자기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 문명을 흡수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3년을 머물다가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내는 그의 귀국을 보지 못하고 그 해에 세상을 떴습니다. 홍종우의 생각은 프랑스어 번역본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심청전)의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 
  따라서 그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홍종우에 대해 보수반동의 인물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는 대한제국 설립 당시 비서원승으로 활약하면서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하여 홍종우는 한러은행 설치 반대, 외상의 도성 개잔(開棧)과 내지행상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 및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어업 및 홍삼 사매(私買) 반대, 방곡실시, 광무연호 주조, 상권보호을 주장한 바 이는 국가재정의 확충과 국내 상인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또한 군주권의 절대화, 군권(軍權)의 확립과 군사권 간섭 반대, 각부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불평등 조계 개정, 만국공법의 철저한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민선의원(民選議院) 설립 등을 생각하였으므로 정부가 자립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이를 보조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1893년 7월 프랑스를 떠난 홍종우는 귀국 전 일본에 도착했다가 병이 나 오랫동안 머물게 되는데, 12월에 이일직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민영소의 밀명을 받고 개화파의 암살을 위해 일본에 온 이일직은 이 계획이 고종의 뜻이라고 전해 홍종우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접근해 세계와 동양의 정세, 조선의 현실 등을 논하고 프랑스 요리, 조선 요리를 그와 손님들에게 대접하며 신뢰를 쌓았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 10년간 떠돌던 김옥균은 일본에게 배신당한 상태여서 홍종우가 상하이행을 권하자 리홍장을 만나 정치적 재기를 할 목적으로 그와 함께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1984년 3월 28일 홍종우는 상하이 미국 조계 내 일본인이 경영하는 뚱허(동화)양행이라는 호텔에서 김옥균을 암살하였습니다.


  김옥균을 암살한 후 그는 관료의 길이 열렸는데 승지, 경찰청장 격인 경무사 책임자가 되었고 1899년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어 보부상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주는 상무사규칙(商務社規則)을 반포했습니다. 이는 홍종우가 꿈꿨던 비즈니스를 통해 재정자립을 주장한 그의 건의를 고종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1900년에는 법부(法部) 사리국장(司理局長)을 거친 후 재판장으로서 법조계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홍종우는 독립협회와 대립각을 세우고 왕정을 수호하는데 앞장섰으나 일본의 조선침략이 점차 심해지자 이재수의 난이 끝난 지 2년 후 마지막으로 제주목사가 되었고 이것이 역사에서 기록한 그의 마지막 행적입니다.
  김옥균을 필두로 한 급진 개화파는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조선을 시급히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들의 의지는 갑신정변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실패하고 살아남은 정변 가담자는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가자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던 지라 일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서 김옥균을 반기지 않았는데 이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김옥균은 도야마 미치루의 지원을 얻어 정치적 재개를 꿈꾸었습니다. 도야마 미치루는 일본 극우파의 원조격으로 여겨지는 사람으로 김옥균의 망명 생활을 지원하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김옥균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합세해 유럽과 미국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종우는 그런 김옥균과는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정부에서도 김옥균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홍종우는 그 일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홍종우는 분명 개화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김옥균을 암살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 왜곡된 굴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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