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대왕과 명림답부 그리고 신대왕
2023. 9. 1. 19:5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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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은 고구려의 7대 왕으로 6대 태조왕의 동생이었습니다. 그가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나이 76세였습니다. 차대왕은 측근들을 고위직에 앉히면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이른바 측근정치를 행하였습니다. 태조왕이 마치 차대왕에게 왕위를 스스로 물려준 것처럼 보이나 차대왕이 왕위에 올라 고복장을 제거하고 태조왕의 아들 막근과 막덕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사실상 차대왕이 협박하여 왕위에 오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서기 148년 음력 7월, 고구려 임금 차대왕(次大王)이 평유원(平儒原)이라는 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흰여우가 임금을 따라오며 울었습니다. 임금은 흰 여우에게 활을 쏘았지만 맞지 않았습니다. 이후 차대왕이 사무(師巫)에게 이것이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사무는 이름을 보면 당시 고구려에서 주술적인 일을 담당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본래 흰여우는 불길한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은 하늘이 미래의 징조를 미리 성상(聖上)께 보여준 것입니다. 불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대비할 기회가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좋은 일로 여기시고 나라와 궁실을 바르게 이끄시면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무가 흰여우를 불길한 징조로 여긴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임금이 화를 내지 않도록 최대한 돌려 말한 것입니다. 차대왕은 당대에 폭정으로 악명 높던 인물로 사무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얘기한 이유를 짐작됩니다. 하지만 그 노력이 허망하게도 임금은 “길하면 길한 것이고 흉하면 흉한 것이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이유가 뭐냐. 이것은 필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화를 내며 사무를 처형했습니다.
‘4년(149)〕 5월에 다섯 개 별이 〔모두〕 동쪽 하늘에 모였다. 일자(日者)는 왕이 화낼까 두려워하여 속여 말하기를, “이것은 임금님의 덕이고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였다.’ 『삼국사기』
다섯 개 별은 동방의 목성(木星: 歲星), 서방의 금성(金星: 太白), 남방의 화성(火星: 熒惑), 북방의 수성(水星: 辰星), 중앙의 토성(土星: 鎭星) 등 5대 행성(行星)을 말하며 일자는 천문을 관측하고 천지의 이변을 해석하는 전문적인 직관(職官)입니다. 본래 무당으로부터 분화하여 발전하였는데,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로 정착하면서 ‘일관(日官)’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일관은 바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차대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꾸민 것입니다.
그러던 165년이었습니다. 연나부 출신으로 명림답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여 차대왕을 시해합니다, 차대왕을 시해했을 때의 나이는 무려 100세에 가까운 나이였습니다. 물론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시해 무렵의 차대왕은 결코 젊은 나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변의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18세기의 실학자이자 역사가인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이 점을 들어, 명림답부 자신에게 급박한 위기가 있었고, 권력 욕심에 흔들려 왕을 시해한 것을 보았습니다. 차대왕의 시해당한 이유로 차대왕 시기에 고구려 5부 가운데 유독 권력에서 배제된 연나부의 불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차대왕을 시해할 당시 명림답부의 관등은 겨우 조의(皁衣)에 불과했습니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고구려 10관등 가운데 겨우 9위에 불과한 것이 조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차대왕을 제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왕을 모시는 호위부대의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연나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차대왕은 연나부가 추대한 인물은 아닐 것이며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와 관련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차대왕이 정말 폭정에 의해 죽은 것인지도 의문이고 차대왕이 죽었을 때가 나이 90을 훨씬 넘어서까지 왕자리를 지키다가 시해당한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자리를 지키는 동안 그 역시 시해당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차대왕이 자신의 형이자 선대 왕인 태조왕을 몰아낸 것처럼 차대왕에게도 동생이 있었으니 그럴 정변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대왕이 왕위 자리를 뺏은 것은 자신의 형인 태조왕은 늙었음에도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유지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역시 눈치채고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정말 몰랐던 것일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차대왕은 태조왕과 함께 서기 165년에 사망합니다. 당시 태조왕은119세, 차대왕은 95세, 그 아우 백고는 76세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백고는 77세의 나이로 신대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형제이고 아버지는 재사라고 합니다. 유리왕이 서기 18년에 사망할 때에 재사가 태어났다고 하면 향후 태조왕이 되는 장남 궁은 스물여덟 살인 서기 46년에 낳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태조왕의 7세의 나이로 즉위하므로 그 때 재사의 나이는 35살임에도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백고는 165년에 77세의 나이로 왕이 되므로 그는 87년생입니다. 그러면 재사는 무려 70이란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인데요. 이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냐라는 말도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또한 차대왕이 146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이지만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146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김부식은 다른 기록들을 두고 우선 『후한서』가 아닌 다른 사료를 참고했고 김부식이 참고했다는 사료로 『해동고기』가 있습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 계사(53년)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146년)에 이르러 왕위를 양보하여 친동생인 수성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태조대왕 본기」
김부식은 후한서에 적힌 기록과 해동고기에 적힌 기록이 서로 상충한다며 의문을 표하는데 일단 후한서가 틀렸다고 보고 본기에서는 해동고기의 기록에 의거해서 적은 것입니다. 『삼국사기』가 한국측 기록을 우선했다는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차대왕의 뒤를 이은 신대왕은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태조왕의 막내로 이름은 백고였습니다. 의표가 영특하고 성품이 어질며 너그러웠다고 합니다. 차대왕이 무도하여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산곡으로 피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대왕이 시해되자 좌보 어지류가 군공들과 논의하여 백고를 왕으로 받들었다고 합니다.
차대왕에 대해서 태조대왕의 먼 방계쯤 되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만약 차대왕이 태조왕이 아들이라면 굳이 그의 동생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태조왕 후반부의 기사들이나 신대왕의 기사들에서 차대왕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사실상 비방에 가까운 기사들로 작성되었기 때문인데요. 신대왕은 아예 태조대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며, 신대왕의 후손인 뒷 시기의 고구려 왕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신대왕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삽입하고, 태조대왕의 사망년도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늦추며 -태조대왕조- 후반부에 장장 23년에 걸쳐 차대왕의 찬탈을 서술함으로써 차대왕을 깎아내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신대왕 때부터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조묘 제사에 대한 『고기』의 기록을 보면 “신대왕 4년(168) 가을 9월에 졸본에 이르러 시조묘(始祖墓)에 제사지냈다”(新大王四年秋九月, 如卒夲, 祀始祖廟)”고 하는데요. 시조묘에 제사는 지낸다는 것은 죽은 시조들에게 자신의 즉위를 알리는 것이자 살아있는 백성들에게 왕위를 무사히 계승했음을 알리는 행위로 태조왕에서 차대왕 그리고 신대왕에 이르기까지 고대국가 고구려 왕실이 어느 쪽인지 정하는 과정에서 현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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