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싸움의 신 고구려 대무신왕
2023. 8. 29. 19:4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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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은 고구려 3대 임금(재위18~44)으로,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추모왕(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의 업적을 이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紹承基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도절태자로 기원전 6년에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인질 교환을 요구할 때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도절이 이를 거부하여 끝내 부여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대소왕이 같은 해 겨울에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심한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패배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기 1년 1월에 죽었는데 사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리왕의 둘째는 해명태자로 장남이자 태자였던 도절이 죽은 뒤, 서기 4년(유리왕 2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유리왕 27년에 태자 해명은 고구려의 고도인 졸본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웃 나라인 황룡국(黃龍國) 왕이 그를 시험해보기 위해 강궁(强弓)을 선물했습니다. 황룡국은 지금의 평안도 용강(龍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려 때 용강성 또는 군악(軍岳)으로도 불렸습니다. 이때 해명은 황룡국 사자가 보는 앞에서 활을 당겨 단번에 꺾어버린 후 “내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유리왕은 황룡국이 자칫 오해를 하여 고구려를 칠까 내심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유리왕은 황룡국 왕에게 사자를 보내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를 하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주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황룡국 왕은 해명의 놀라운 기개에 눌려 두려운 나머지 결국 죽이지 못했습니다. 이때 유리왕은 태자에게 칼을 보내 자결토록 하였고, 해명은 창 자루를 땅에 깊이 꽂아놓고 말을 달려 창끝에 그대로 엎어져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사망 당시 고작 21세였으며, 사후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유리명왕의 삼남인 무휼이 태자가 되었습니다. 태자가 되었을 때는 유리명왕 33년 봄 정월에 태자에 올랐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1년 앞서 유리명왕 32년 겨울 11월 부여가 쳐들어옵니다. 당시 유리명왕은 무휼에게 막도록 햇습니다. 그리하여 무휼은 소수의 병력을 학반령 골짜기에 숨겨두고 학반령 아래에 적이 왔을 때 기습하여 부여군대를 패배시켰습니다. 그럼 10세 때에 군을 지휘하여 부여군대를 격퇴했다는 말인데 쉽게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서기 18년, 유리명왕이 승하하자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3년째 되었을 때 서기 20년 부여의 대소가 새를 보내왔습니다. 부여사신이 보낸 것은 바로 붉은색 까마귀로 이것을 고구려에 주었는데, 머리는 하나고 몸은 둘인 새였습니다. 이 까마귀를 얻은 부여에서 점을 쳤는데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으로 이것이 변하여 적색이 되고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두 나라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부여가 고구려를 합친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점괘를 부여만 알아선 안된다고 하여 사신을 통해 이 까마귀를 고구려로 보낸 것입니다. 한편 이 까마귀를 받은 대무신왕은 부여사신에게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하여 남방의 색인 붉은색이 되고, 또 붉은 새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에서 먼저 얻어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니 두 나라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지는 그대도 알 것이다. 이는 부여가 고구려에게 합쳐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는데요. 까마귀야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대무신왕이라는 이름 못지 않게 지혜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대무신왕은 서기 22년 부여 정벌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는 부여원정길에 괴유와 마로란 사람을 얻게 되었습니다. 둘 다 무사였으므로 대무신왕의 원정길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평야에 진을 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부여에게 눈에 띄기 쉬웠습니다. 대소왕은 기병들을 이끌고 고구려의 군대를 습격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습니다. 고구려 군대 주변은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진흙탕이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고구려와 부여 간에 싸움이 벌여졌습니다. 고구려 장군 괴유가 부여왕에게 달려들어 제거하였습니다. 이로써 부여의 왕 대소가 제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곧 부여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 군대 역시 진흙탕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고구려가 쳐놓은 함정에 자신들 역시 빠진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은 누구 하나의 편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자욱히 낀 안개가 7일이나 계속되었고 대무신왕과 그의 군대는 가짜 인형으로 부여군을 속이고 도주해야했습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급식을 했다.’ 『삼국사기』
사실상 대무신왕의 부여원정은 부여왕 원소를 제거했지만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여는 이 위기를 넘기는 듯 했지만 의외의 곳에서 안좋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구려군이 2월에 회군한 뒤 4월에 대소의 아우이며 금와왕의 막내아들이 1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동부여를 탈출했습니다. 그의 무리가 압록곡에 이르러 사냥 나온 해두국왕(海頭國王)을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에 나라를 세우고 갈사국왕이 되었습니다. 갈사수가 어디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일단 압록곡에서 해두국왕을 맞닥뜨린 걸 보면, 압록강의 한 지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 동생이 1만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습니다. 그는 ‘대소왕이 죽고 왕의 동생은 도망쳐 따로 갈사국을 세웠는데, 자신은 나라를 이끌 재목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대소왕이 사촌동생이 고구려로 귀순한 이유가 설득이 갖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왕 종제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주민집단은 적지 않은 규모로 대무신왕도 이들 주민들을 특별히 5부의 하나인 연나부(椽那部)에 소속시키고 부여왕 종제를 왕으로 봉해 이를 통솔케 했습니다. 연나부는 후일 왕비족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 동부여 주민집단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무신왕은 재위 9년에는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고,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으며 재위 15년, 최리의 낙랑국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재위 20년에는 후한의 낙랑군을 정벌하여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죽기 직전 도로 후한에게 빼앗겼습니다.
한편 대무신왕대에 후한이 쳐들어왔습니다. 대무신왕 11년 후한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한 것입니다. 이 때 송옥구는 기습작전을 제안하였고 좌보 을두지는 장기전을 말했습니다. 대무신왕은 위험성이 높은 송옥구의 기습작전보다는 안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 을두지의 작전에 동의하였습니다. 고구려군은 위나암성에 들어가 방어를 했습니다. 위나암성은 한 쪽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문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으므로 쉽게 공격해 올 수 없는 성입니다. 고구려는 성안에서 버티면서 을두지는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술과 함께 적에게 보냈습니다. 후한의 군대는 성안의 고구려군의 식량과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인데 을두지가 보내온 물건들을 보고는 고구려하고 장기전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한편 대소는 주몽의 건국신화에서도 등장하지만 그의 손자인 대무신왕의 부여원정에서도 등장합니다. 대소는 22년(삼국사기 기준)에 전사했으나 출생년도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주몽은 건국 19년 만에 나이 40세에 죽었으니 B.C 58년생입니다. 주몽이 대소가 죽은 22년이면 80세입니다. 거기에 대소가 주몽의 큰 형님뻘이니 대소는 약 85세~90세였을 것입니다. 물론 고대국가사회에서도 잘 먹으면 그 정도 사는 건 있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가 전장을 누볐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 신라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끄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데요. 다만 대소왕이 그 나이에 전장을 누볐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무언가가 잘못된 기록이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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