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이야기 고구려 건국신화

2023. 8. 26. 19:3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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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없어 산처에 제사를 지내던 부여왕 해부루는 어느날 공연이란 연못가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개구리‘란 뜻의 ’금와‘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여의 재상 아란불은 꿈에 천신이 나타나 동해 바닷가의 가섭원으로 옮겨 나라를 옮기라 했다며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 …’ 『삼국사기』
이 후 해부루가 죽어서 금와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부여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해모수와 정을 통한 유화 부인이 우발수라는 곳에서 울고 있자 금와가 데려와 가두었는데요. 유화부인에게 햇빛이 비추고 얼마 뒤 큰 알을 낳았습니다. 이 알은 돼지도 피하고 들판에 버렸을 때는 새들이 날아와 보호해주니 이 알속에서 나온 사내아이가 나이 일곱 살이 되어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니 사람들은 그를 주몽이라 불렀습니다. 이후 주몽은 금와의 일곱 아들의 질투를 받아 오이, 마리, 협부를 데리고 비류수에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라고 합니다. 주몽을 해모수의 아들이라 하였기 때문에 해씨는 다른 고구려 지배세력 가운데 하나로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 된 것은 천제의 권위와 해씨 집단의 힘을 동시에 끌어들이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몽이 활을 잘 쏜다는 것으로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켰고 이는 즉 군사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몽은 위기 상황에서 ‘천제의 손자, 하백의 외손’이라는 일종의 주문을 외우면서 활로 물을 쳐서 어별교를 만드니 당시 활은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부분도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적 수장이 종교적으로도 지도자역할을 했으며 고구려의 제천행사는 왕이 주관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종교와 군사 그리고 정치적인 부분을 모두 아우르는 자가 지배자가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화에도 그러한 면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몽은 일찍이 준마를 알아보고 그 말의 혀뿌리에 바늘을 꽂아 여위게 하여 금와왕으로부터 그 말을 얻는다고 하니 이는 주몽의 지혜로움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주몽의 건국신화는 주몽의 여러 가지의 다재자능한 모습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 주몽의 건국설화는 하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북방계 유목민들이 정착민이 되고 농업생산을 시작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신화로서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2개의 부여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동부여와 북부여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동부여 출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으로부터 나왔다. 동명은 원래 탁리왕의 아들이다. …(중략)…’『양서』
『양서』에서는 고구려가 탁리왕의 시녀의 아들이 ‘부여왕’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갈라져나온 것이 바로 고구려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사서에서 고구려의 건국이야기를 전하면서 사서에 따라 내용의 길이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나오는 국가가 바로 부여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위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위서』를 편찬한 북제는 한족왕조가 아닌데 당시 위나라 사신들이 고구려의 건국이야기를 자세히 들었거나 혹은 고구려에서 직접 서적을 받아 옮겨적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더라도 중국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시조의 출처를 부여라고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광개토대왕비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에 대해 출신을 북부여라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동부여’라고 한 것은 생각하면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은데요.  
‘하백(河泊)의 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 「모두루묘지」
 장수왕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모두루묘지>에도 북부여라고 전하고 있으니 모두루묘지나 광개토대왕비가 모두 장수왕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에는 추모왕의 출신을 북부여로 인식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에 대해 부여나 북부여나 그게 그거지 않냐 할 수 있으나 ‘추모왕께서 어머님의 명에 따라 수레를 타고 순행하며 남쪽으로 가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鄒牟王奉母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淹利大水)’는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을 생각하면 분명 고구려인들인 부여와 북부여를 다르게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기원전 37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현도군은 무제 원봉4년 (107년)에 세웠다. 세 개의 현이 있으니 고구려…등이다.’ 『한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후한서』
나라이름이 아니더라도 이미 주몽 이전에 고구려란 명칭이 역사서에 등장한 것입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쇠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하고 있다.’『위략』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들을 본다면 주몽 이전에 있었던 고구려는 아마 연노부의 고구려일 것입니다. 그리고 북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세력이 의해 연노부의 고구려가 통합되거나 연합하면서 더 큰 나라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럼 부여땅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지역에도 사람들이 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요. 고대 만주지역에 거주한 한국의 종족 명칭을 가리키는 역사용어가 있으니 바로 예맥족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관련하여 예·맥·예맥이 많이 주목되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현재로서는 정설이 없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종족 기원에 대해서는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이 있으니 사실상 고구려와 예맥족으로 할 수 있는 추측은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중국사서에서는 예족과 맥족, 그리고 예맥족이 각각 나온다는 것은 아마 예족과 맥족이 따로 있었고 두 세력이 통합하여 예맥이 되었다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후한서』를 보면 고구려에 대해 맥인이라 하고 ‘예맥’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다만 고구려에 대해서는 예족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요. 아마 고구려는 맥족이었는데 근처에 살던 예족을 통합하여 예맥족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즉, 중국인들에게 예족과 맥족을 대표하는 것은 어느 순간 고구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맥족이라 불리던 맥족이 중국 자료에는 예족이라 기록된 고조선세력을 흡수하였고 이것이 기록자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시조 동명성왕은 성은 고씨요 휘는 주몽이다’
이렇듯 『삼국사기』의 기록을 빌리면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왕이자 주몽인데요. 사실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설화는 많이 닮아 있습니다. 즉 부여설화에서 나라를 세운 이가 바로 동명왕입니다. 그러니까 동명왕은 부여의 시조이고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으로 부여 중 한 갈래인 북부여 세력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건국설화도 가져가서 후대인들에게 전달하면서 이 역시 혼동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동명의 후손 가운데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인정이 많고, 어질고 믿음이 있었다.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우고,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아내로 삼았고 이로 이 나라는 동이(東夷) 가운데서도 강국(强國)이 되었다. 처음 100 가(家)의 집으로 나라를 시작하여 '백제'라고 했다’ 『양서』
백제의 또다른 건국설화 구태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도 동명이란 말이 나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당시 만주에 기원했던 세력들은 동명을 자신의 시조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양서』에서도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으로 나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추모왕은 세월이 지나면서 신처럼 모셔졌으니 자신들이 부르는 추모왕을 부여의 건국영웅 동명성왕이라고도 부르며 존중하려 했고 그만큼 이 일대 사람들에게 동명성왕은 위대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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