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결혼풍습 데릴사위제
2023. 7. 27. 10:4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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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후에야 신라의 집으로 돌아온다.’ 『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의 혼인풍습은 혼인하기 전에 말로써 미리 신랑 신부를 정하면,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사위집이라고 부른다. 날이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절하면서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거듭 요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 때서야 사위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사위집 곁에 쌓아둔다. 그 후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본집으로 돌아온다.’ 『삼국지』
이렇듯 고구려에서는 처가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혼인제도가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처가살이가 처음 시작된 시기는 고구려시대로 추정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처가살이를 서옥제(壻屋制)라 불렀습니다. 이는 양쪽 집안이 결혼에 합의하면 신부집 뒤뜰에 '서옥'이라는 별채를 지어 신혼집으로 사용했고, 아이가 장성하면 비로소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 제도입니다. 『수서(隋書)』에는 “고구려의 서옥에서 남녀가 서로 상열(相悅)한 다음, 남자의 집에 돼지와 술을 보낸다. 이 외의 재물을 받으면 수치로 안다” 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풍습은 고려에도 이어졌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처가살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또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 불렀는데, 일정 기간 신랑이 처가에 머물러 사는 제도입니다. '장가'(丈家)란 말이 장인·장모의 집이라는 뜻이니 장가간다는 말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처가살이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도 계속됩니다.
한편 동옥저의 결혼풍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동옥저의 혼인 풍습은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는 그 여자를 맞이하여 장성하도록 기른 다음 아내로 삼는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는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삼국지』
이에 대해 우리나라교과서는 민며느리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며느리제는 신부가 어릴 때부터 신랑의 집에 가서 사는 것으로 민며느리제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반대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혼인제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돈이 매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고구려와 옥저의 결혼에서 남성의 여성의 집에 머무는 것 그리고 신랑이 돈과 폐백을 가져가는 것은 신부를 돈 주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일부인데요. 서옥이라는 집에 살면서 사위는 신부집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서류부가혼속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처가살이가 여성에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위에다 장차 태어날 손자들까지 책임지려면 처가에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하고 비구니가 되는 여성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결혼이 신분상승의 도구로 사용된 점입니다. 요즘과 달리 신분사회였던 고려 때는 출세를 위해 권문세가에 장가드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내가 힘없는 집안의 딸인 경우 이혼하고 다시 명문가로 장가드는 남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종의 처가살이도 유교사회가 정착되어가는 조선시대에 들면서 공격받았고 중국처럼 여자가 시댁에 들어가 사는 '친영제'(親迎制)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여성들의 지위가 하락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현대에도 처가살이를 하는 모습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그들의 조상을 추적하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어 미얀마 및 태국, 중국 윈난성에 살고 있는 라후족에게 고구려의 흔적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궁이를 사용하고 콩으로 된장을 만들어 먹습니다. 야채를 소금에 절인 와찌라는 김치도 담가 먹습니다. 다른 부족과 달리 찹쌀로 지은 찰진 밥을 좋아합니다. 우리와 같은 절기를 사용하므로 설날도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처럼 설은 연중 가장 큰 명절이어서 모두 모여 색동옷을 입고, 제사 음식을 차려놓고 지신밟기를 합니다. 고구려 옛 풍습처럼 남편이 처가살이를 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받아들입니다. 아기를 낳으면 대문밖에 새끼줄을 쳐서 외부사람들이 못 오게 하고, 숯과 빨간 고추를 매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이렇게 풍습까지 우리나라와 비슷한 게 많아 역사학자 중에는 이 부족을 ‘고구려인의 후예’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 기록입니다. 13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고구려가 망한 이듬해, 당나라는 반란을 이유로 수만 명을 끌고 가 중국 서북쪽 불모지에 내팽개쳤습니다. 이 부족이 그 후예들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원래 라후족이 고구려 민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지난 92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아프가니스탄 수석고문이었던 金炳豪박사의 르포소설 <치앙마이>에서 처음 제기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정일 뿐 인류학적,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주장은1990년대 중반에 제기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해당지역에 사는 교포들은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습니다. 생활풍습이 일부 같다고 해서 우리의 조상으로 어떻게 볼 수 있느냐는 것이며 태국인들도 김치를 담가먹고 설날에 제기를 차고 있는데 이들을 우리민족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비슷한 예로 중국 묘족에 대해서도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결혼 풍습만 보아도 고구려와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 즉 형수와 같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사취수(兄死娶嫂) 또는 취수혼(娶嫂婚)입니다. 왜 그들은 머나먼 땅에 있게 된 것일까.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4만여호를 양자강 이남으로 이주시킨다. 이들은 나중에 서부-동부-남부의 묘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고구려와 유사점이 발견된다고 하는데요. 우선 그들은 궁고라는 바지를 입습니다. 궁고는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는 남성의 의상으로 주로 말을 탈 때 입습니다. 엉덩이 부분이 올라와 있기 때문에 말을 탈 때 들썩이거나 떨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또한 그들의 의상 가운데에는 조우관이 있는데 이는 까마귀 깃털로 만드는 모자입니다. 고구려는 유목민족처럼 새를 섬겼으며 특히 삼족오 상징이 말해주듯이 까마귀를 신성시 했습니다. 이러한 조우관 역시 고구려 벽화의 수렵도에 나오는 의상입니다. 아울러 그들이 농작물을 타작을 하는 모습이나 길쌈을 하는 모습 등은 한국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스러운 것은 과연 데릴사위제나 형사취수제가 과연 고구려만의 전유물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다만 고구려의 결혼풍습이 바로 데뤼사위제라는 것일 뿐, 묘족이나 라후족이 데릴사위제나 형사취수제를 한다고 해서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억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묘족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주장하는 연구원은 결정적인 근거로 송나라 시기 문헌인 『노암학필기(老學庵筆記)』에 새롭게 등장하는 '가뤼'라는 민족 이름을 들었습니다. 고구려의 말기 이름인 '고려'가 남방 민족 언어의 영향을 받아 '가뤼'로 변한 것으로 그는 추정하였습니다. 또다른 송나라 시기 문헌인 『계만총소(溪蠻叢笑)』에는 먀오족이라는 민족이 등장하는데 '가뤼'는 자칭이고,'먀오족'은 한족이 부르는 명칭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한족 문인들은 계속 반란을 일으키는 낯선 민족을 야만인이라는 뜻에서 먀오족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풍습인 데릴사위제, 그리고 이 고구려의 풍습을 닮은 묘족과 라후족. 이들은 과연 고구려의 후예가 맞을까요. 한편 이 주장이 맞다면 고구려의 후예들을 변방으로 내몰았던 중국이 이제 와서 고구려가 자신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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