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고구려는 왜 한반도 남정을 했을까

2023. 7. 21. 17:5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728x90

광개토대왕릉비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수병(戍兵)으로 두셨다.…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와 있는 고구려의 원정으로 한반도 남부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합니다. 가야가 그 세력이 약해졌고 일부가 영남과 일본 등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한반도 남부원정은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갸아, 왜군의 격돌이었습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펼쳐진 국제전쟁이자 이전에 없었던 큰 전쟁, 특히 철갑 기마부대와 철제 무기를 무장한 고구려의 남정은 그보다 훨씬 앞서 진행된 포상팔국전쟁보다 규모가 컸을 테지만 예상보다 속전속결로 고구려 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임나가라의 도성인 종발성은 함락한 직후 고구려는 철수하였고 이 일로 변변한 역사서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가야가 수천리 북방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문에 그 존재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신라는  2~3세기에 사로국에 불과했고 당시의 국력은 아마 가야에 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합군에서 신라의 역할을 길잡이였을 것입니다. 
‘영락 9년 기해년(399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었습니다.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은 (그 신분이 대왕의) 민(民: 백성)이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399년에 광개토대왕은 왜 평양으로 갔을까요. 400년의 일은 신라가 구원하여 5만의 군사를 보낸 것으로 나와 있지만 399년에 광개토대왕은 이미 가야 및 한반도남부원정을 염두에 두며 평양으로 간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구려의 움직임에는 국제적 정황이 포착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움직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가령 왜의 군대가 이미 한반도 남부에 있다가 가야와 함께 신라로 정벌을 단행했을 것입니다. 당시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가 같은 진영에 있었고 또한 이진어ㅔ신라는 이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라는 고구려를 한반도 남부로 끌어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이에 잔주(殘主)[24]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그런데 고구려의 한반도남부 원정이 있기 이전의 396년의 광개토대왕의 비문내용을 보면 백제의 아신왕 시절 광개토대왕에게 무릎을 꿇고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약속합니다. 비문에서는  백제를 잔(殘), 혹은 잔국(殘國)이라고 한껏 멸시하는가 하면 그 국왕, 즉 아신왕을 가리켜서는 잔주(殘主)라고 깎아내립니다. 엄연히 고구려의 기록이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신왕 재위 당시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열세를 보였고 단 한 번의 승리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어찌되었든 396년의 백제 아신왕의 맹세 이후에 397년에 백제는 왜와 화친을 맺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분명 이를 경계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399년 고구려는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고 보았으니 396년에 백제왕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던 약속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제가 이후에도 397년테 왜와 우호를 맺으면서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낸 것이나 398년에는 군대를 한산 북책까지 보냈다가 철군시키는가 한편 399년에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병마까지 징발하였습니다. 아마 고구려도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고 400년의 고구려 남정은 이와 관련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400년에 고구려는 백제가 아닌 임나가라를 쳤을까. 그것은 임나가라가 백제와 왜의 연결고리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아 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신라가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어도 이기지 못했는데 어찌 신라 혼자서 임나를 멸할 수 있겠소’ 『일본서기』
이러한 내용은 400년 고구려의 원정 때 임나가라가 완전히 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99년에 고구려가 신라에게 비밀계책을 알려주었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비밀로 부쳐지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추정은 가능한데 고구려 신라 연합군 세력에 도움을 준 또다른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400년의 기사에서 ‘ 그래서 라인(羅人)을 수병(戍兵)으로 두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안라인수병’이 안라국 경계병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남부원정 당시 함안 아라가 고구려, 신라 편에 서서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함안 안라국은 고구려,신라와 연합하여 싸움에 가담하였고 승리를 발판으로 성장해 갔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5세기에 만들어진 말이산 고분군이나 함안의 전형적인 토기유형인 화염문투창토기의 분포가 더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살필 수 있으며 안라국이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대신 무언가를 취했다는 정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전쟁은 임나가라 지배층이 항복하여 순식간에 마무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 지역을 정벌하고 고구려는 이 지역의 제철장인들과 지배층을 고구려로 끌고 갔을 가능성도 있는데요. 애초부터 고구려는 정복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백제와 임나가라 그리고 왜 사이의 관계를 끊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생각에 수혜를 본 것은 신라입니다. 고구려군대의 출병으로 인해 신라는 나라를 보존함은 물론, 이후 가야는 분열을 맞이하게 되어 가야의 악세는 앞으로의 신라 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라는 이 시기에 고구려의 속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을 테지만 신라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 편이 나았는지도 모릅니다. 백제와 가야의 압박에서 신라는 단독으로 버틸 수는 없던 것입니다. 고구려 역시 후연과 서쪽에서 맞닥뜨리고 있었으므로 한반도남부는 친신라정책으로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원정으로 김해가야의 붕괴와 함께 지배층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왜군을 따라 망명한 것입니다. 해당 지역에 대해 신라의 간섭은 앞으로 심해졌을 것입니다.
사실 이 원정은 고구려에게 부담이 큰 것이었습니다. 서쪽의 후연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5만의 군사를 남쪽에 보낸다는 것은 도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고구려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던 데에는 북위와 관계를 맺으면서 후연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백제를 견제해야 했고 역시 이웃국가이자 경쟁국가인 신라에 대한 지원은 예상된 수순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반도남부에 대한 안정은 후연과 대결을 염두에 둔 결정이라고 생각되는데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밀린 후연이 결국 407년에 멸망하게 되니 고구려의 한반도 남부원정은 단지 신라를 구원하는 것에 목적을 둔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