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속의 고구려 제나라

2023. 1. 18. 18: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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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 통치 범위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에 의해 많은 고구려인들이 만주의 서쪽에 있는 영주라는 곳으로 강제이주당합니다. 당시 이 곳에 끌려온 고구려인들은 약 20만 명, 그리고 이 곳에서 당나라에 나라를 세우는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정기로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전에 중국 산둥반도에 제나라를 세우고 당나라를 위협했던 고구려인의 후손입니다. 사실 이정기에 대한 출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강제이주당한 고구려인의 후손일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명이 회옥인 그는 732년에 태어났으며 당나라 안에서 안녹산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주에 주둔하고 있던 평로군의 장수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안녹산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당나라 조정에서는 평로군을 비롯한 여러 군대에게 안녹산 진압에 동원될 것을 명령했으니 여기에는 위구르족의 군대도 포함되었습니다. 당시 위구르의 대장은 힘이 세고 사나워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고 다른 절도사들도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이정기가 나서서 결투를 신청하였고 사람들은 당연히 위구르 장수의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정기의 무예는 위구르의 대장을 압도했고 승리는 이정기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겼는데 당시 그는 고모의 아들인 후희일과 함께 하고 있었고 이정기는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후희일을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이정기 동상

하지만 평로군은 당시 중대한 기로에 맞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당나라의 편에서 이를 제압할 것인가 아니면 안녹산의 반란에 가담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그가 속한 평로군은 평로절도사에 속해있었고 평로절도사는 당나라보다는 안녹산과 더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안녹산도 한 때는 평로절도사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 안녹산은 자신과 가까운 서귀도를 평로절도사를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후희일과 이정기에게 안녹산과 뜻을 함께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후희일과 이정기는 안녹산 대신 당나라를 선택합니다. 후희일과 이정기는 안동도호이던 왕현지와 모의하여 서귀도를 죽이고 왕현지를 평로군사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얼마 못가 죽게 되었고 이에 이정기는 후희일이 평로군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나라조정에서는 왕현지의 아들을 평로군사로 임명합니다. 이에 이정기는 화가 나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평로군을 장악하고 후희일로 하여금 평로군사 자리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당나라에 대치된 상황에서 안녹산도 적으로 두게 되었으므로 이유는 후희일이 예전에 안녹산이 보낸 사신을 죽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후희일과 이정기는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만주를 떠나 본토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로 한 것입니다. 761년 근왕병 2만명을 데리고 산동반도 등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당나라 조정에서 후희일에게 주․청주 등 여러 주를 관장하는 평로치청절도사라는 관작을 내려주게 되었습니다. 당나라 입장에서 이 때부터 후희일과 이정기의 부대에게 치청군이라는 별칭이 붙여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적인 영광은 후희일을 기고만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큰 절을 짓고 지역의 경제를 흔들게 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희일보다는 이정기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765년 후희일이 쫓겨나고 이정기가 평로치청절도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이정기의 치청왕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때 당나라로부터 ‘평로치청절도관찰사’ 겸 ‘요양군왕’으로 책봉되었고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당나라의 성씨인 ‘이’와 함께 정기라는 이름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당나라와의 책봉관계는 치청이란 지역이 하나의 독립된 지역임을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이정기는 이전의 후희일과는 행보가 달랐습니다. 그는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세력을 넓혀나가니 10개 주에 걸쳐 10만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그 지역은 산동반도 대부분이 해당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지역의 여러 세력들은 이정기의 치청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치청왕국은 그저 하나의 행정구역이고 이정기는 당나라가 임명한 행정관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치청왕국 내에서는 이정기가 임명한 관리가 존재했고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다른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정기의 꿈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를 제압하고 중원을 통일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을 옮기기 위해 그가 정벌한 것은 바로 777년의 서주였습니다. 서주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여기에 중국 남부의 세금이 집결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치청의 서주점령은 당나라를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서주의 서쪽 지방인 변주에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당시 이정기는 사촌형인 이유를 서주자사로 임명하고 자신은 운주로 가 당나라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서주 남쪽의 용교와 와구까지 점령하니 치청왕국은 남방의 물자를 장악하여 당나라 조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치청왕국의 영토는 한반도보다 넓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대해 이정기는 공정하게 법으로 잘 통치했다고 사서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781년, 이정기는 49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아들 이납이 뒤를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정기의 빈자리를 눈치챈 서주자사 이유와 이사진은 당나라로 붙었으며 이는 당나라에게 장안으로 통하는 운하를 뚫어주는 역할을 하여 당나라의 숨통을 틔워주었고 치청왕국이 오히려 곤경에 처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782년에 다시 변주를 빼앗고는 대운하를 막았고 당나라는 이에 군대를 일으켜 막고자 했으나 오히려 출병을 하려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은 함락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당시 당나라 황제 덕종은 양주로 피신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치청은 다시 당나라로부터 ‘제’라는 국호를 받습니다. 당나라입장에서는 치청을 회유하여 자신을 편을 끌어들이려 했으며 이납을 국왕으로 책봉하는 제나라는 명실상부한 독립왕국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납이 792년에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이사고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사고는 당나라하고 비교적 원활하게 지냈으나 근처의 번진 즉, 이웃 무장세력과 갈등이 많아 잦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도 일찍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06년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이복동생 이사도였습니다. 

신라 원정군 추정로

당시 당나라에서는 덕종 이후 헌종이 황제가 되었고 그는 당나라 내의 혼란을 수습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진들을 제압하더니 제나라의 주변 세력을 제압하고 칼끝은 제나라로 향했습니다. 이사도는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 제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목숨을 노렸고 이를 두려워한 당나라 신하들이 제나라의 정벌을 말렸으나 헌종은 주변 번진들과 함께 제나라를 토벌하기로 하였고 이러한 고립작전으로 인해 제나라는 운명의 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가을 7월, 당나라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나라 헌종(憲宗)이 그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임금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삼국사기』
우리나라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3만의 군사를 산동반도에 출병시켰으니 이 병력은 당나라를 지원하여 고구려의 후손이 세운 치청왕국을 무너뜨리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고구려 멸망 100년후인 765년부터 819년까지, 고구려인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55년간에 걸친 제나라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제나라를 우리의 역사 속에 편입시킬 수는 없으나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고구려유민들과 힘을 합쳐 나라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제나라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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