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은 어디까지였나.

2022. 11. 23. 07:5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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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고구려는 위기였습니다. 모용황이 서기 339년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신성(新城)을 공격한데 이어 342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는가 하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갔다가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이 서기 371년 평양까지 치고 올라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고구려는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죽은 지 4년 뒤인 서기 375년을 시작으로 376년, 377년 그렇게 해마다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다분히 부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란 태자 담덕은 백제는 정복해야 할 나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다음 해인 392년 7월에 4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황해도 지역을 공격하여 10개 성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9월에는 북쪽의 거란을 쳐 500명의 포로를 잡고 거란에 빼앗겼던 백성 1만 여명을 이끌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뒤 10월에는 다시 백제로 향하여 수군기지 관미성을 향합니다. 당시 관미성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는데 광개토대왕은 7개의 진로로 해군을 동원하여 함락시켰고 이로써 고구려는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백제를 더욱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충지를 탈환하기 위해 백제 아신왕이 393년에 1만 명을 거느려 공격하기도 하고 황해도로 다시 회복을 노렸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오히려 수곡성 싸움에서 광개토대왕이 7천 병력이 백제군에 승리를 거둡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남부정벌은 한강유역까지 내려왔습니다. 서기 399년에는 신라가 백제와 왜의 공격을 받아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5만이라는 병력을 신라로 출병하였습니다. 
학계에서는 광개토왕대의 주된 진출 방향을 비옥한 농경지와 인구 조밀 지역인 남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전과(戰果)로 '64성(城) 1천400촌(村)'이 기록돼 있으며 학계에서는 '64성 1천400촌' 가운데 '58성 700촌'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이남지역에 대한 정벌한 것만을 기록한 것이라면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될 정도로 한반도 남부 정벌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예는 신라가 구원을 요청했을 때 고구려가 5만의 군사를 동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그동안의 팽창정책의 성과와 맞물려 신라 지원을 통해 한반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부정벌을 통해 고구려의 문화가 남부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아마 광개토대왕의 정벌은 민족동질화의 하나의 계기로 볼 수 있는 것이며 고구려가 멸망당하고 나서 고구려의 유민들이 대거 신라로 귀순하는데 배경으로 작용되었을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과 영역

광개토대왕의 원정은 북쪽으로 이어졌습니다. 395년에는 거란을 치고 398년에는 북방의 수신을 복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이후 선비족이 후연을 세우게 되자 407년에는 후연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후연의 수도 용성을 사면에서 압박하자 후연을 이에 견디지 못하고 내부 반란이 일어났으며 모용운이라는 사람이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은 북연이 됩니다. 사실 모용운은 고국원왕 12년인 342년 모용황의 침입으로 끌려간 고구려 인질 1만 여명의 중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용보가 왕위에 있을 시절 그의 서자인 모용회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공로로 모용보의 양자가 되었으며 모용씨의 성을 받은 것입니다. 이후 모용희의 폭정이 심해지자 한인(漢人)가문인 풍발씨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용운은 즉위한 뒤 성을 다시 고로 고쳐 고구려의 후예임을 밝혔고 북연은 고구려에 위성국처럼 되었습니다.  410년에는 동부여도 정벌합니다. 
그럼 서북요동방면으로는 어디까지 진출했을까. 
“비려’(碑麗)에서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주지 않자 몸소 정벌하러 나섰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를 건너 수많은 우마군양을 획득하고 600~700영(營)을 확보했다. 수레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 북풍(北豊)에 이르러 땅을 둘러보고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 ” 「광개토대왕비문」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비려는 거란의 한 갈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란의 중심지는 시라무렌강쪽으로 가야합니다. 이 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지만 고구려시기에는 신성으로 가는 길을 택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경로는 어떠했을까. 중국의 사서 『자치통감』에는 요하 서쪽에도 고구려성인 무려라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성을 지나 광활한 벌판을 지나면 울창한 의무려산을 만나게 됩니다. 초원지대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 산은 엄청난 삼림자원을 품은 산으로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은 이 산은 부유하다는 의미로 부산(富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의무려산을 넘으면 다시 평원이 나타나고 평원 끝에 나타나는 산을 노노루산맥으로 부산(負山)으로 불렀습니다. 그럼 염수는 어디일까.
 “요태조(야율아보기)가 강에서 소금을 취해 군에게 지급하도록 명령했다.” 『요서』
지금의 시라무렌강 주변에는 염분이 가득 함유된 호수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이러한 염기 때문에 땅이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소금이 나는 강과 호수가 있는 시라무렌강이 바로 염수인 것입니다. 영은 이 때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이곳 사람들에 따르면 고려영자라는 말이 전해지므로 고구려 마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영자에는 보통 15가구정도가 있었고 이것이 600~700영이었으니 광개토대왕의 비려국정벌은 상당한 전과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시라무렌강은 현재 몽골자치구에 있는 것이므로 광개토대왕시기의 영토는 광활했습니다. 
그럼 당시 고구려군은 어느 정도 위용이었을까. 동부여나 가야는 당시 고구려군을 맞닥뜨리면 곧바로 항복하거나 투항했다고 하니 아마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군대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철조각들을 촘촘히 이어 만든 찰갑을 입고 전투를 했는데 갑옷으로 결합된 철판의 유동성이 전혀 없는 갑옷인 판갑에 비해 제작이 어렵고 대량 생산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찰갑은 판갑에 비해 몸을 움직이는데 더 자유로웠으므로 더 큰 전투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기병은 말까지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말에는 등자라는 것을 장착하여 말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등자가 유럽에 등장한 것은 8세기무렵이었습니다.

중국집안현 소재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은 영토확장에만 힘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장사, 사마, 참군 등의 관직을 신설했습니다. 그리고 소수림왕대의 불교진흥책을 계승하여 소수림왕의 불교 진흥책을 계승하여 요동을 차지한 뒤 이 지방의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승려 담시를 파견하여 민심 교화 사업을 펼쳤으며 평양에도 9개의 절을 지으며 불교를 장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도 이미 광개토대왕 시기에 계획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졌습니다. 
‘그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이르렀고 그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에 널리 퍼졌다. 또한 생업을 편안케 하였으므로 나라는 부유하고 오곡이 풍성하게 무르익어 백성은 넉넉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유언에 따라 330가구에 달하는 수묘인을 지정해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신라나 북연의 왕 고운의 수묘인이 스무가구였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리고 이 수묘인들은 백제인들을 데려와 꾸렸습니다. 이것은 백제인들도 고구려의 백성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생전에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에게 항복하면 제후국으로 도어 평화를 도모했으니 바로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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