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건국설화와 고구려건국설화는 왜 닮았을까.
2022. 11. 13. 08:0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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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여란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고대국가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출도’라고 하는 정치체제가 특징인 나라로 알고 있는데 왕을 중심으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를 우두머리로 하는 세력들이 모인 연맹왕국이라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지배층과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피지배 계급으로 나뉘어 생활한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과정에서 부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여라는 단어는 백제의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는 데서 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부여’란 단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 우리나라 두 번째 국가로서 부여가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알면서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부여의 나라에 대해 건국설화는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 천제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흘승골성으로 내려오더니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고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란 나라를 세웁니다. 그리고 이 해모수가 아들을 낳아 해부루라 하고 ‘해’를 성으로 삼았습니다. 어느날 해부루의 대신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자신의 아들이 이곳에 나라를 세울 터이니 동해 바닷가 가섭원이란 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라고 말합니다.이에 아란불은 꿈의 내용을 해부루에게 말하니 그 곳으로 옮겨가 나라를 ‘동부여’라 합니다. 이런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늘에 빌어 아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제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말이 어느 돌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이상히 여겨 돌을 들추었더니 아이 하나가 나옵니다. 그 모습이 황금빛 개구리와 같아 아이 이름을 금와라고 짓고 아들로 삼아 자신의 뒤를 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와의 뒤를 이은 것이 바로 대소입니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가 이 나라를 쳐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해모수에서 해부루 그리고 금와와 대소에 이르기까지 총 4대에 걸친 짧은 계보를 알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약 700~8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였고 그 기간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여에게는 또다른 건국설화가 전해집니다. 옛날 북쪽에 탁라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시녀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죽이려 하자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시녀는 아들을 낳았으니 왕은 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했으나 돼지는 입김을 불어주어 죽이지 않았고 마구간에 버리니 역시 입김을 불어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왕은 다시 이 아이를 어미에게 돌려주어 기르게 하니 이름은 동명이었습니다. 아이는 자라서 말과 소를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명은 활솜씨가 뛰어났는데 이를 두려워한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엄체수에 이르러 강물이 가로막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널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명이 다 건너 뒤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니 병사들은 더는 추격할 수 없었고 동명은 부여땅에 도읍을 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사람 왕충이 쓴 『논형』이란 책에 전해지는 내용으로 흡사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비슷합니다. 동명왕이란 이름과 활을 잘 쏘는 재주를 가진 아이와 이 아이가 마굿간에 일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고 그러던 중 만난 강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넌 후 그 다리들이 흩어지니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이후 왕이 되었다는 스토리는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빼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따르면 부여는 탁라국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나라는 삭리 혹은 고리국(槀離國)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고리라는 명칭에서 고려가 나왔고 이후 코리아가 된 것입니다. 그럼 이 건국설화가 시대적 배경이 되는 부여 건국시기는 언제일까. 학계에서는 한 나라가 흉노 동쪽땅을 평정한 시기인 기원전 119년에서 한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 사이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중국 역사서 『사기』에서는 진시황 시기에 이미 조선과 부여에 대한 기록이 나오므로 고조선과 부여는 함께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고 성립시기는 기원전 3세기 후반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설화에서는 동부여의 금와왕이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게 되었는데 유화가 어두운 방안에서 한 줄기 빛을 받아 알을 낳으니 이 알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주고 길에 던져주었으나 동물들은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억지로 쪼갤수도 없던 알을 다시 어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알에서 태어난 것이 주몽입니다. 역시 부여의 건국설화처럼 주몽은 활을 잘 쏘았고 말 기르는 일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사냥을 나갔는데 주몽은 적은 활로도 더 많은 사냥하니 사람들이 질투가 심하여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부여를 도망치게 되었고 강물을 만나 곤란함에 빠졌을 때 하늘을 향해 구원을 하니 부여의 건국설화처럼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목숨을 구하고 이후 졸본이라는 곳에 다다라 나라를 세우니 바로 ‘고구려’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구려의 건국 설화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북부여 출신의 추모왕이 이룩했고 그는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이 추모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고 동명왕은 바로 부여를 건국한 인물이 됩니다. 그럼 어쩌다가 두 인물이 혼재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부여는 강한 나라였고 고구려는 이보다 후발주자로서 세력이 약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압록강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농사짓기가 적합하지 않았고 토질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다른 평야지대를 얻기 위하여 이른 바 정복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팽창하려는 고구려와 본래 강자이던 부여 사이에 마찰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6년 부여왕 대소는 인질을 교환하자고 요청하면서 당시 고구려 2대 유리왕은 태자 도절을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자 도절은 겁을 먹고 가지 않았는데 이에 대소가 노하여 군사 5만을 일으켜 고구려 침공에 나섭니다. 하지만 도중에 큰 눈을 만나게 되었고 고구려 정벌은커녕 오히려 큰 피해만 입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부여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고구려와의 관계는 역전당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부여는 285년에 선비족의 침략으로 수도가 함락당하고 346년에는 전연의 침략을 받아 왕과 많은 백성들이 끌려갔습니다. 이미 나라의 기운은 크게 기울었고 494년에 고구려에 항복함으로써 부여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부여는 나라뿐만 아니라 신화마저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여와 고구려가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부여의 멸망 원인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고구려에는 전문적인 전투집단이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적군을 상대하니 부여와의 싸움에서도 이들 계층의 힘으로 전투 우위를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여는 5부족 연맹체였는데 고구려 역시 연맹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이들 연맹집단의 세력이 약화되고 중앙귀족으로 변모했으며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의 군사체계는 각각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분화된 부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의 부여란 나라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고 그 건국설화마저 고구려의 것에 융합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여 역시 우리나라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동북공정은 진행하는 중국 역사학계 역시 부여를 자국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부여란 고대국가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은 부여, 고구려가 예맥이 세운 고대국가라는 점인데 문제는 부여를 세운 예맥족을 중국학계는 고대 한족(漢族)으로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고구려 역사 지키기도 중요한 만큼 부여의 역사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건국설화가 닮은 만큼 고구려의 역사를 지키는 것이 바로 부여의 역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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