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싸움, 어떻게 싸웠나.
2022. 11. 12. 07:5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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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가 패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잠시 평화시기가 있었습니다. 건국 초기의 당나라는 안정이 필요했고 당을 세운 고조 이연도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실패를 교훈 삼아 고구려 정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이 두 나라는 여수전쟁간의 생긴 포로를 맞교환하는 평화적인 제스처를 서로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태종은 이세민,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현무문의 변’, 이렇게 왕조 국가로서는 썩 순조로운 계승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오른 당태종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황제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정관의 치’라고 하는 업적으로 개인적인 마음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공정한 정치를 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과 문화를 대단히 사랑하여 각 왕조사와 『오경정의』를 편찬하도록 명하기도 했으며 그 스스로도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고 글씨를 매우 잘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당태종은 그런 이미지하고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당전쟁의 주역이고 게다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다가 고구려의 군대에 막혀 실패하고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정벌을 실패하긴 했지만 그전까지 당태종은 국방에서도 강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북쪽의 돌궐을 제압하고 서쪽의 토번과 고창국을 정벌하여서 세력을 떨친 것입니다. 이러한 당태종의 위세에 고구려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 내에서 대당 외교에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왕의 왕이었던 영류왕은 온건파였고 연개소문은 강경파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류왕이 당나라에 대해 저자세였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강역지도를 바치는가 하면 수나라를 이긴 전승기념탑 ‘경관’을 헐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왕위를 이을 태자를 직접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니 강경파는 이에 대해 못마땅해했고 이들 간에 대립은 영류왕의 연개소문 제거작전계획으로 옮겨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이 탄로 났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니 고구려와 당나라는 이후 더욱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643년 9월 4일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인들이 당으로 조견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니 군사를 내어 구원해 달라” 『자치통감』
당나라는 신라는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데 이러한 신라를 고구려가 공격한다는 것에 당나라를 불만을 표출하고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임금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유도 내세웠습니다. 고구려는 이전 수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백제는 당시 중립을 시켰던 것과는 달리 신라는 고구려의 후방을 괴롭혔고 당태종 본인도 자신의 형과 아우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터라 이러한 이유로 고구려를 쳐들어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뿐인 명분이었습니다. 당태종의 본심은 딴 데 있었습니다. 당태종은 요동 땅을 중국땅이라 생각했으므로 이를 고구려가 차지한 것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요동지역에 대해 이전 수왕조가 4번의 원정을 시도하나 실패했으니 자신이 이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며 고구려 영류왕의 원한도 갚고 주변의 여러 나라는 당나라에 굴복했는데 고구려만 이에 따르지 않으니 자신이 이를 고쳐놓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따지고 보면 고구려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원정을 감행한다는 것입니다.
‘이세적이 이끄는 선발부대는 유성을 출발하면서 깃발을 나부끼고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빠져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넜다. 당나라 군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진군해오자 고구려군은 크게 놀라 성읍마다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태세에 들어갔다.’ 『삼국사기』
당나라 군대는 수나라 군대의 원정 실패를 교훈삼아 규모만 믿고 정면 돌파를 하지 않고 우회하여 서북쪽 신성을 함락하고자 했으나 거센 저항에 막혀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남쪽의 개모성을 향하여 함락하였고 요동성으로 향했으며 이 때에는 당 태종의 주력군도 합류하여 그 기세가 더욱 올라갔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신성과 국내성에서 군사 4만을 뽑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1만 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요동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기세에 백암성이 스스로 항복했으며 요동 반도 남쪽에 있던 비사성도 당나라 수군에 함락되었습니다.
당태종은 연승으로 기세가 올라 안시성으로 향했습니다. 다급해진 것은 고구려였습니다. 그리고 고연수와 고혜진으로 하여금 병사 15만을 주어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적의 보급을 끊어 지구전으로 싸우자는 장수의 말을 무시한 고연수는 당나라와 전면전을 벌이다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당나라는 안시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쳐 함락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성안을 굽어볼 수 있는 흙산을 60일 만에 만들어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흙산이 무너지면서 고구려의 성을 덮쳤고 무너진 고구려성에서 군사들이 몰려나와 흙산을 점령하였습니다. 당나라는 3일간 공세를 펼쳤으나 흙산을 차지하지 못했고 당태종을 군대의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요동 지방은 일찍 추워지므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가 오래 머물 수가 없고 또한 양식이 다 떨어져 갔기 때문에 군사를 거두었다.’
과연 이 말대로 양식이 다 떨어져서 당나라군대는 철군했을까. 그동안 고구려를 상대로 얻은 식량들은 다 어찌했을까. 만약에 저 기록이 진짜라면 그동안 승전기록은 부풀러졌거나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길목에서 고구려군의 습격을 당해 보급의 차질에 빚거나 고구려에 패한 전투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채호선생은 색다른 주장을 했는데 당시 연개소문이 북경 북쪽 상곡지방을 공격하여 이에 당나라가 당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당나라는 퇴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당군은 물러나면서 안시성주에게는 비단 100필을 보내 그의 용맹함을 치하하고 연개소문에게는 활과 옷을 보냈다고 기록을 전하니 중국황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후퇴과정은 너무 참담합니다. 또한 당태종이 요하 하류를 지나 퇴각하였는데 늪지대가 많아 지나가기게 어려웠다고 합니다.
‘황제는 1만 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삼국사기』
그런데 비사성을 당나라 수군이 함락한 바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당나라가 퇴각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645년 11월 수군 총관 장문한을 참수했다.’ 『자치통감』
‘646년 수군 책임자 장량을 옥에 가두었다.’ 『신당서』
아마 고구려수군의 활약으로 당나라 수군이 격파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퇴각하는 당나라군대를 연개소문이 뒤쫓아왔다는 정황까지 포착되었으니 당태종이 직접 출격한 당나라 원정은 처참한 패배인 것입니다.
‘645년 12월, 왕이 등창을 앓아 태자가 빨아냈다. 646년 3월, 왕이 병이 나 정사를 태자에게 맡겼다. 647년, 왕이 풍질(風疾)을 얻었다.’ 『자치통감』
이 외에도 『구당서』, 『신당서』에도 요동에서 병을 얻어 당 태종이 사망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 병이 종(內腫)·한질(寒疾)·이질(痢疾)등 제각각이므로 사실상 전쟁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가 남긴 유언은 이렇습니다.
‘고구려 공격을 그만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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