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는 왜 백제의 구원요청을 거절했을까.

2022. 11. 4. 20: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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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당시 중요한 지역 중 하나가 바로 한강유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선점하고 건국되었던 백제는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한강유역은 넓은 평야와 더불어 많은 인구가 살던 곳으로 이 곳을 점령한다는 것은 당시 산업의 근간이던 중요 농업지역을 가진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이 곳을 점령하여 많은 인구를 통한 세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이곳을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강유역에 두고 삼국의 다툼을 치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369년에 백제에 대해 공세를 취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 때마침 이루어진 고구려의 공격은 악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2년 뒤인 371년,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역공을 취했고 이로 인해 전장터에서 고구려는 왕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합니다. 잊을 수 없는 일을 당한 고구려는 이후 광개토대왕시기와 장수왕시기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내달렸고 이 시기에 과거 전장에서 죽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자 남쪽으로 칼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시작된 것이 바로 장수왕의 남진정책, 당시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실행될 수 있는 정책이었습니다. 대륙에서는 북쪽에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있었고 남쪽에는 한족에 세운 왕조가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고구려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이 두나라 입장에서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가 쳐들어온다면 무척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나라는 고구려왕에게 조공과 책봉 관계를 맺어 안심시킵니다. 고구려는 중국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많은 조공품을 보내는 대신 벼슬과 함께 많은 답례품을 받아온 것입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와 남북조 간에 어느 정도 긴장모드가 풀리게 되었고 장수왕은 남진정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표면적으로는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는 것으로 나타냈고 따라서 국내성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475년, 장수왕은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백제를 쳤습니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에게 국서를 보냅니다. 
‘고구려와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 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신 마음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해주소서,’
하지만 북위는 이러한 백제의 구원요청을 거절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민족들과 손잡고 북위를 압박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북위는 고구려의 모습에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북위의 수도는 북경으로 이곳에 온 사신들 중 고구려의 사신은 남제의 사신 다음으로 서열 2위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만큼 고구려의 힘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국서가 북위의 손에서 고구려로 넘어갔으므로 고구려의 분노를 샀고 이로 인해 대대적인 백제에 대한 압박으로 아차산성에서 개로왕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가 바로 475년이니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사망하지 100여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점령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고구려의 대외활동으로 현재 남한에서도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이며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에서는 고구려 목간이 발견된 것입니다. 

고구려 목간

이 목간은 551년 이전에 제작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간이며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유역을 고구려가 점령했음을 알리는 유물이었습니다. 이 목간은 15.6㎝, 너비 2.5~2.7㎝, 최대두께 0.4㎝로 손에 잡기 좋은 크기입니다. 한쪽 면에 한 줄로 큰 글자 6~8자, 우측 하단에 4자 정도의 작은 글자가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본래 백제가 가지고 있던 몽촌토성은 장수왕이 남진이후 고구려의 소유로 넘어갔고 한성에 도읍을 했던 백제로서는 475년에 오늘날의 공주, 즉 웅진으로 도읍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고구려가 수리하거나 조성한 도로, 성토대지, 집수지, 건물지,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원통형 세발토기와 두 귀 달린 항아리, 시루, 바리, 화살촉 등 전형적인 고구려 유물 등이 출토되면서 이 목간이 고구려의 것임을 증명했으며 이 목간에 대해서는 469년에서 541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목간의 글자를 제대로 판독할 수가 없어 고구려의 것임을 확신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목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종이가 널리 쓰이기 전에 고대사회에서는 나무나 천, 돌, 금속에 기록을 남겼고 잣대나 막대 모양으로 깎은 나뭇조각에 글자를 기록한 것을 목간(木簡)이었습니다. 고대의 주요 기록매체이자 의사소통 수단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목간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짧게든 길게든 이 지역이 고구려의 행정구역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峨嵯山 一帶 堡壘群)은 아차산에서 발견된 삼국 시대 유적으로, 이중 반 이상이 고구려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남진기지를 만들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아차산 보루성입니다. 그리고 이곳과 가까운 구의동 유적지에서는  백제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유적과 유물이 나오면서 학계를 흥분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아궁이와 솥단지를 비롯한 생활흔적이 발견되었고 무기들도 출토되면서 아차산과 가까운 구의동에 대해서 고구려의 최전방 군사기지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의동 유적지를 복원하면 고구려의 독특한 군사건축기법인 치가 있는데 각각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의동 유적은 일종의 전방초소였고 아차산 보루성은 중대급이 머물던 최전방 군사시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적지는 당시 한강유역을 두고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 간의 긴장상황을 알 수 있는 터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눈치를 봐야했던 것은 바로 이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신라였습니다. 신라는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백제와의 우호관계를 저버리고 고구려의 편에 섰습니다. 엄밀히 따진다면 고구려의 우산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이에 백제는 가야와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니 고구려는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왕은 광개토대왕으로 군사 5만을 보내어 토벌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 영토내에 들어온 고구려 군사들은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토내당주’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당주는 고구려군의 우두머리로 이를 통해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내정을 간섭받았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구려는 실성 대신 눌지를 왕위에 앉히며 신라의 왕위 계승문제에 관여하였습니다. 하지만 눌지는 이러한 고구려의 정책에 굴하지 않고 다시 백제와 손을 잡는 선택을 합니다. 그러다 450년에는 고구려의 장수가 지금의 강릉인 실직에서 신라 성주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고 10여 년 후에는 신라에 주둔한 고구려 군사 100여 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바로 고구려를 쳐달라고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가 고구려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으로 시작된 고구려의 공세에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의 협력관계를 확고한 군사동맹으로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백제와 신라의 역공으로 고구려가 취한 아차산 보루성 일대는 고구려의 전진기지가 아닌 수비에 치중해야 하는 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달장군이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죽었다고 『삼국사기』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아차산성을 아단성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강유역 쪽으로 내려오던 고구려는 다시 백제와 신라에게 내주게 되었고 이 지역을 다시 동맹을 깬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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