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이유
2022. 7. 22. 21:2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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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야말로 고구려의 걸출한 민족 영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영걸(英傑)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당 태종 이세민도 연개소문만큼은 두려워했다. ‘당을 정벌하고 한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 잡았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이었다.“ 『조선상고사』, 신채호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연개소문에 대해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개소문은 중국인의 전통극에서도 그려지고 있는데요. 경극에서 칼을 다섯 개나 차고 주인공을 겁박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입니다.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 고구려 남자들은 누구나 다섯 자루의 칼과 숫돌까지 차고 다녔습니다. 경극에서 보이는 연개소문의 복장과 가면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지만 적어도 경극에서 묘사된 그의 옷차림은 사실은 고구려 남자들에게는 일반적인 의상이었습니다. 어찌되었던 경국에서 연개소문이 이렇게 묘사되었으니 중국에서 연그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공격을 그만두라(罷遼東之役).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중국 측의 기록에 따른 당 태종의 유언은 당시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당시 당태종은 고구려정벌을 친히 지휘하였다가 안시성에서 패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당태종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는데 당태종의 죽음에 대해 중국 측의 기록이 엇갈리는 점과 요동에서 병을 얻었다는 점은 아마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이것이 병으로 이어진 듯합니다. 정말 그랬다면 당태종 죽음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은 당시 안시성의 성주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집권자로서 당나라의 전쟁을 지휘한 사람 연개소문의 공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당태종 입장에서는 고구려 정벌 실패라는 과정을 되짚으며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며 따라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태종도 두려워할만한 고구려 사람이 연개소문이라면 중국 측에서 그를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 측의 기록은 좀 다를까요.
‘그 부친인 동부(東部)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자리를 잇게 되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고 미워하여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 소문은 여러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 자리에 임시로 있어 보아서 만일 불가한 일이 있으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간청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가엽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뒤를 이은 개소문은 여전히 흉악무도함으로 여러 대인이 왕과 더불어 비밀히 의논해 죽이려다가 일이 누설되었다. 연개소문이 휘하의 군사를 다 모아 사열하는 것처럼 꾸미고 성의 남쪽에 주찬(酒饌)을 성대히 베풀어 대신들을 초청했다. 그들이 오자 모두 죽이기를 백여 명이나 하고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고 몇 토막으로 잘라 개천 속에 버렸다.’『삼국사기』
이것은 연개소문이 최고 집정자로 올라서는 모습을 기록한 옛 사서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연개소문은 여러 대신들과 고구려왕이 연개소문을 죽이려 하는 비밀이 누설하자 이를 참지 못한 연개소문이 군사사열을 명목으로 신하들을 불러들이고는 영류왕을 토막 내어 죽이고 그와 같이 대신들마저 죽인 희대의 살인마입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연개소문은 당시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영류왕과 대신들이 그를 죽이기로 모의했기 때문입니다. 유교적 관점에서 집단 살인을 저지른 그의 행적이 비판이 되는 것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링 코너로 몰려 죽음에 이를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연개소문이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영류왕과 연개소문 간의 갈등이 위와 같은 비극을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어떠한 것이 그들 사이에 갈등을 가져왔을까. 연개소문이 대당외교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였으니 영류왕은 반대의 입장을 보였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왕제(王弟) 건무[영류왕]는 을지문덕과 같이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두 원훈이지만, 을지문덕은 북진남수(北進南守)주의를 지키고, 건무는 북수남진(北守南進)주의를 주장하여, 양자가 서로 다투었다. 영양왕이 죽고 건무가 즉위하여 더욱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니, 수당 교체 시기에 을지문덕 일파 군신들이 그 기회를 타 서북으로 강토를 넓히자고 주장하나, 왕이 듣지 않고 당에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맺고 수나라 말에 포로가 된 중국인을 다 쇄환하며, 장수태왕의 남진 정책을 다시 써 자주 군사를 내어 신라와 백제를 쳤다." 『조선상고사』, 신채호
신채호 선생은 영류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을지문덕과 외교적인 면에서 마찰을 빚고 있었으며 그 이유는 을지문덕이 백제와 신라와 친하게 지내고 중국 쪽으로 확장할 것을 주장한 반면 영류왕은 그와 반대로 중국 쪽과 화평을 취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압박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건무(영류왕)은 수나라 군대를 물리칠 적에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이러한 공적과 더불어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라는 점에서 영양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건무는 수에서 당으로 교체되는 중국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미묘한 무언가를 읽어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그는 당나라에 온건한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622년에는 당은 고구려에 남아 있는 수나라군의 포로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고구려는 1만 여명의 수나라 포로들을 돌려보냅니다. 당나라의 이러한 입장은 당연히 고구려에 대한 유화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 수나라 포로들 중에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당나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포로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1만 여명에 달하는 사람이 당나라로 갔다는 것은 고구려 입장에서 당나라의 요청에 성심껏 대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628년에는 봉역도, 즉 고구려의 지도를 당나라에 보냈습니다. 영류왕 입장에서는 이를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확실히 하고자 하는 의도였겠지만 연개소문과 같은 대당강경파에게는 대당 전쟁시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 기밀의 유출과도 같았습니다.
이후 626년에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당 사이에 흐르든 따뜻한 흐름은 차갑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의 발단은 당태종의 외교정책 변화에 있었습니다. 당나라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만든 경관(승전탑)을 헐 것을 요구하자 영류왕은 이에 응했고 640년에는 세자 환권이 당나라에 입조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 왕이나 세자의 입조를 요구한 것은 장수왕 이전이니 세자 입조는 당시 큰 사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세자가 입조하기 전까지 고구려는 당태종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으며 그 사이 천리장성을 쌓으며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당나라에 온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영류왕과 대당강경파 사이에 갈등을 점점 커져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릅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도 막리지였으므로 연개소문 가문의 힘도 강했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당연했지만 원로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영류왕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세운 연개소문 암살계획은 그 비밀이 누설되어 제대로 역공을 당합니다. 이러한 정변의 원인은 수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소모를 체험한 영류왕의 유화정책과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정책이 맞부딪힌 결과였습니다. 연개소문의 정변소식이 당나라에 전해졌을 때 대당강경론자가 집권에 성공했음에도 당태종은 크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고구려를 칠 명분을 찾고 있던 그에게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가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주었으니 영류왕의 유화정책과는 별개로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계획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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