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승리 살수대첩

2022. 7. 17. 21:1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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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113만 3천 800여명의 병력을 동원되었습니다. 병력의 길이가 960리, 400km에 달했다고 합니다. 보급운송을 합치면 더 많은 숫자였을 것입니다.  300여 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19세기 이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을 고구려에 정벌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589년 정월 수나라는 진나라 수도 건강을 함락하고 370여 년간의 대혼란을 마감, 중원을 통일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고구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진나라와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진나라 멸망은 고구려 평원왕에게 전해져 근심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뒤를 이은 영양왕은 달랐습니다. 그는 말갈을 동원하고 거란을 단속했으며 몰래 돈을 써서 쇠뇌기술자를 꾀어 고구려로 귀순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수문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양왕에게 친서를 보내 귀의할 것을 권유, 그렇지 않으면 멸망시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양왕 9년 598년에는 오히려 1만 명의 병력으로 영주총관을 선제공격하였습니다. 사실상 이 선제공격이 수당전쟁의 빌미가 되었다는 시각입니다. 이곳은 수나라의 전진기지로 고구려는 이 공격을 통해 입조를 거부함을 알렸고 동시에 고구려는 대수나라 전쟁을 준비합니다. 같은 해 6월 30만 대군이 고구려로 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전투기록은 없고 3개월 만에 끝난 정벌은 죽은 자가 10명의 8, 9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장마로 인해 병들고 폭풍을 만났다고 하지만 아마 고구려에게 대패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워낙에 희생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수문제의 뒤를 이은 수양제는 돌궐인으로 위장한 수나라군사로 하여금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을 정벌합니다. 이후 수양제는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말레이시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합니다. 서기 610년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고구려는 없었습니다. 이를 근심한 수양제는 운중지역을 돌다가 돌궐의 수장 계미칸으로부터 고구려사신이 와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고구려 사신에게 이르기를 고구려 왕에게 입조하지 않으면 돌궐과 함께 고구려로 가겠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수나라 입장에서도 고구려 정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황제의 친정을 만류했습니다. 사실상 수나라 신하들은 고구려와의 일전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비친 것입니다. 이에 불쾌감을 느낀 수양제는 오히려 대운하 확장을 명령합니다. 양자강에서 북경지역으로 연결되어 곡물과 다른 군수품을 운송하는 데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612년에 완공된 이 일에 수백만 명이 강제동원되었습니다. 한편 산동성 래주에서는 유주총관 원홍사의 지휘로 수백 척의 전함을 건조했습니다. 전쟁 반대 목소리가 높아짐에도 주야로 일을 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수족을 자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300척의 전함이 완성되었습니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2좌군 12군,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12군, 수양제의 친위군 6군이  총 113만 여명입니다. 북경에서 출발한 부대는 960여 리에 달하는 행렬이었고 수나라의 수군도 동시에 대동강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상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을 제외하면 고대사의 최대 전쟁입니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400망 명, 수나라는 4600만 명이었습니다. 수나라는 병력과 지원병을 합하면 200만 명, 병력은 113만 명은 고구려의 남성을 200만 명으로 볼 때 가히 압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수나라의 대고구려침입로

요동성에 가기 위한 요하에 다다른 수나라군대는 이를 건너기 위해 부교를 띄었으나 짧아 병사들은 강물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첫 전투에서 거물급 사령관인 맥철장이 사망하였으며 한 달 동안 지체되었습니다. 이 후 본진이 도착한 후 강을 건너기 시작하면서 고구려도 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요동성에 다다랐고 이를 함락하기 위해 수나라는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에 실패합니다. 고구려는 성 주변에 해자를 파서 물을 채우고 이를 방어용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가공된 돌로 성벽을 만들었으며 이 돌은 깊이 박혀 외부섬돌이 빠져나가더라도 또다른 돌이 배치되어 무너지지 않도록 철옹성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치라는 방어용 성벽이 있어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었고 옹성, 어긋문도 마차가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의 성은 30미터가 정도의 높이가 큰 성이었습니다. 이를 공략하기 위해 수나라는 사다리차 운제와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소차, 그리고 성벽에 돌을 던진 투석기가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수성전은 수나라의 보급에 차질을 빚게 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수나라와의 일전을 위해 들에 곡물을 싹 다 거두어갔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 했습니다. 이른바 청야입보전술입니다. 

을지문덕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한 수나라 군은 30만 별동대를 내려 보냈습니다. 하지만 길목마다 이동로를 차단하고 수나라의 보급부대를 공격했습니다. 수나라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고구려군의 사령관 을지문덕이 홀로 몸을 이끌고 수나라 진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항복문서를 전하러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으로 항복의사를 전하며 적진을 탐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수나라군의 진군을 지연시키는 역할도 했는데요. 협상을 끝내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에 우중문은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이후 고구려군은 7번 싸우면서 패하는 척하며 그들을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수나라 군사들은 100일 치 식량을 가지고 갔으나 엄청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버리고 가거나 땅에 몰래 묻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식량부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을지문덕의 청야전술로 보급의 현지조달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구려 측에서는 사실상 수나라의 궁핍한 사정을 알고 있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시를 보내게 됩니다. 고구려의 꾐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은 수나라군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나라 군대는 방진을 치면서 후퇴하였습니다. 방진은 네모나게 병사를 두고 그 안에 보급품과 수송비전투요원을 두는 대형이었습니다. 사방으로 경계하는 이러한 방진은 소모가 큰 대형이었습니다. 그렇게 후퇴하던 수나라군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미리 막아둔 둑을 터뜨려 수나라군을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게다가 사서에는 수공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강을 건너가는 수나라 군대의 후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만 전할 뿐입니다. 이 공격으로 대군의 후미를 맡고 있던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게 됩니다. 강 건너와 있던 군대와  강 가운데의 군대, 강을 건너지 못한 수나라 군대들은 제대로 된 진영을 갖추지 못한 채 고구려군대에게 당하였습니다. 대형이 깨진 부대는 엄청난 희생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를 계속 추격하여 이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0만 명 중에 고작 2700여 명만 생존한 전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패배에도 수양제는 전쟁을 계획합니다. 613년의 정벌에서는 후방 군량 책임자인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였습니다. 수양제는 철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구려는 수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사신 중 한 사람이 작은 쇠뇌를 가지고 들어가 수양제에 가슴에 발사했습니다. 암살은 미수에 그쳤으나 수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음을 한탄했습니다. 결국 618년 수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수양제의 무덤은 300년 만에 통일한 제국의 2대 황제였지만 그에 비해  작고 정리가 안된 모습이며 그의 묘지석은 벼락에 맞은 채로 방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그의 업적과 과오가 기록되었으니 요동에서 일을 벌이다 천하를 잃었다고 그의 묘비에 적혀 있습니다. 수양제는 천하를 얻기 위해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으나 아이러니하게 이 전쟁은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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